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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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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다이고 천황은 다이카쿠지 왕통의 고우다 천황의 둘째 아들로, 1288년에 태어나 1318년 31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는 천황 친정을 목표로 했으며, 엔기·덴랴쿠 시대를 이상으로 여겼다. 1331년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이 실패하여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탈출 후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겐무 신정은 과거의 제도를 부활하려 했으나, 무사들의 불만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3년 만에 붕괴되었고, 이후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1339년 5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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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고다이고 천황
다카하루 (尊治)
시호고다이고 (後醍醐)
별칭요시노인 (吉野院)
겐토쿠인 (元徳院)
겐오테이 (元応帝)
재위1318년 3월 29일 ~ 1331년 10월 21일
1333년 7월 7일 ~ 1339년 9월 18일
즉위일1318년 4월 30일
대관식1318년 12월 15일
시대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묘호도노오 능 (塔尾陵)
능묘도노오 능 (塔尾陵)
출생일1288년 11월 26일
사망일1339년 9월 19일
사망 장소요시노 행궁
아버지고우다 천황
어머니이쓰쓰지 다다코
배우자사이온지 키시
주시 내친왕
자녀존료 친왕
세료 친왕
모리요시 친왕
무네나가 친왕
쓰네나가 친왕
나리나가 친왕
고무라카미 천황
가네요시 친왕
간시 내친왕
쇼시 내친왕
신분제96대 일본 천황
추존 시호고다이고인 (後醍醐院) 또는 고다이고 천황 (後醍醐天皇)
추존 시호 칙정일1339년 10월 11일
연호분포 (文保)
겐오 (元応)
겐코 (元亨)
쇼추 (正中)
가랴쿠 (嘉暦)
겐토쿠 (元徳)
겐코 (元弘)
겐무 (建武)
엔겐 (延元)
통치 정보
섭정고우다 법황 (1318년-1321년)
관백니조 미치히라 (1316년-1318년)
이치조 우치쓰네 (1318년-1323년)
구조 후사자네 (1323년-1324년)
다카쓰카사 후유히라 (1324년-1327년)
니조 미치히라 (1327년-1330년)
고노에 쓰네타다 (1330년)
다카쓰카사 후유노리 (1330년-1333년)
태정대신산조 사네시게 (1318년-1319년)
고가 미치오 (1319년-1323년)
다카쓰카사 후유히라 (1323년-1327년)
이마데가와 가네스에 (1332년-1333년)
정이대장군모리쿠니 친왕 (1308년-1333년)
집권호조 다카토키 (1316년-1326년)
호조 사다아키 (1326년)
호조 모리토키 (1327년-1333년)
계승 정보
선대 천황하나조노 천황
후대 천황코곤 천황 (비정통)
고무라카미 천황 (남조; 정통)
코묘 천황 (북조; 비정통)
기타 정보
친서
이미지
고다이고 천황 초상화
문관 개안 '견본착색 고다이고 천황 어진' (세이조코지 소장, 중요문화재)

2. 생애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고우다 천황의 차남이었다. 어머니는 이쓰쓰시 다다쓰구(五辻忠継, 미나모토노 다다쓰구/みなもとの ただつぐ일본어)의 딸로 내대신(内大臣) 가잔인 모로쓰구(花山院師継, 후지와라노 모로쓰구/ふじわらの もろつぐ일본어)의 양녀가 된 다테몬인(談天門院) 다다코(忠子)였다. 1288년 11월 26일(쇼오/しょうおう일본어 원년 11월 2일)에 태어나 1302년(겐겐/けんげん일본어 원년)에 친왕선하(親王宣下)되었다. 1304년(가겐/かげん일본어 2년)에 다자이노소치가 되어 소치노미야(帥宮)로도 불렸다.

즉위 전 그의 이름(이미나)은 다카하루 친왕(尊治親王)이었다.[4]

그는 다이카쿠지토 천황인 고우다 천황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추시/ふじわらの ただし일본어/다다코/ふじわらの ただこ일본어(후지와라노 다다쓰구/ふじわらの ただつぐ일본어/이쓰쓰지 다다쓰구/いつつじ ただつぐ일본어)의 딸이었다. 그녀는 단텐몬인(談天門院)이라는 뇨인이 되었다. 그의 형은 고니조 천황이었다.

오가타 겟코의 목판화 삼폭 병풍; 가사기야마 궁전에서 유령을 꿈꾸는 고다이고 천황


고다이고 천황의 이상은 다이고 천황이 통치하던 시대인 엔기 연호(901~923) 시대, 즉 천황의 직접 통치 시대였다. 천황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사후에 정해졌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다이고 천황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생전에 스스로 시호를 정했다.

2. 1. 출생과 즉위

고다이고 천황은 다이카쿠지 왕통의 고우다 천황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이쓰쓰지 다다쓰구(五辻忠継)의 딸이자 가잔인 모로쓰구(花山院師継)의 양녀인 다테몬인(談天門院) 다다코(忠子)이다.[4] 1288년 11월 26일(쇼오 원년 11월 2일)에 태어났으며, 1302년(겐겐 원년)에 친왕선하를 받았다. 1304년(가겐 2년) 다자이노소치가 되어 소치노미야(帥宮)로도 불렸다.[4] 즉위 전의 이름은 다카하루 친왕(尊治親王)이었다.

1308년(도쿠지 3년), 지묘인 왕통의 하나조노 천황 즉위에 따라 황태자가 되었고, 1318년 3월 29일(분포 2년 2월 26일)에 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를 받아 3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는 1068년 고산조 천황이 36세에 즉위한 이후 250년 만에 30대에 즉위한 사례였다. 즉위 후 3년 동안은 아버지 고우다 천황이 인세이를 실시했다.

고우다 법황의 유조에 따라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는 형인 고니조 천황의 아들 구니요시 친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중계'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128] 그러나 이는 지묘인 왕통 측 문서에서만 보이는 주장이며, 실제로는 그 정도로 약한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21년(겐코 원년), 고우다 법황은 인세이를 중단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고우다 천황이 진언종 수행에 전념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설과,[129] 고다이고・구니요시에 의한 다이카쿠지 왕통 체제를 확립하여 지묘인 왕통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노린 것이었다는 설[130] 등이 있다.

고다이고 천황은 다이고 천황이 통치하던 엔기 연호(901~923) 시대를 이상으로 여겨, 천황의 직접 통치를 목표로 하였다. 그는 생전에 스스로 시호를 '고다이고'로 정했는데, 이는 다이고 천황의 이름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2. 2. 겐무 신정과 몰락

겐코 원년(1331년),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이 측근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의 밀고로 발각되면서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 삼종신기를 가지고 거병했으나 실패하고 오키 섬(隱岐島)에 유배되었다.(겐코의 난)[133] 이 시기 천황의 아들인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과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 등 '악당'(悪党)이라 불리는 반(反) 바쿠후 세력들이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1333년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 등의 도움으로 오키 섬에서 탈출, 호키 센조산(船上山)에서 거병한다.[134]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가 천황측에 가담하여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략했고,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가마쿠라를 함락시키고 호조 집안을 멸망시켰다.

겐코(元弘) 3년 6월 5일(1337년 7월 17일)에 수도로 돌아온[135]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을 개시하였다.[136] 고다이고 천황은 고곤 천황의 즉위 및 재위를 부정하고, 막부와 셋칸(摂関)을 모조리 폐지하였다. 또한 양통질립을 폐지하여 왕통을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단일화하였다. 자신의 친아들 모리요시 친왕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삼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는 자신의 이름자 한 자인 타카(尊)를 하사하여 다카우지(尊氏)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하고,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이나 산기(参議) 등으로 임명하였다. 기로쿠쇼(記録所) ・ 온쇼보(恩賞方) ・ 잣소케쓰단쇼(雑訴決断所)[137] ・ 무샤도코로(武者所)[138] ・ 구보도코로(窪所) 등의 중요 기관이 재흥 또는 신설되었다. 지방 정권으로써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를 도호쿠(東北) ・ 기타간토(北関東)로(무쓰 쇼군후), 타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를 가마쿠라(鎌倉)로 배치하였다(가마쿠라 쇼군후).

1334년 1월 29일(1334년 3월 5일), 광무제(光武帝)의 연호인 건무(建武)에서 따서 연호를 겐무(建武, けんむ)로 바꾸었다.[140] 5월 3일에는 겐무 덕정령(建武の徳政令)이 발호되고[141] 5월 18일 온쇼보가 재편되었으며[142] 8월에는 잣소케쓰단쇼가 확충되는[143] 등의 정책이 행해졌다. 또한 경화(硬貨) ・ 저폐(楮幣, 지폐)의 병용이라는 관전(官銭) 건곤통보(乾坤通宝)의 발행을 계획하였다.[144]

겐무 2년(1335년) 6월 22일, 다이나곤(大納言) 사이온지 긴무네(西園寺公宗)의 모반이 발각되어, 무샤도코로 직원인 구스노키 마사시게 ・ 고 모로나오 등이 포박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148]

겐무 2년(1335년),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가 일으킨 나카센다의 난(中先代の乱)을 진압하러 칙허도 없이 토고쿠로 향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난의 진압을 수행했던 장수와 사졸들에게 가마쿠라에서 독자적으로 은상 지급을 행했다. 이는 겐무 신정에 대한 이반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추토를 명했다. 요시사다는 하코네 ㆍ 다케노시타의 싸움(箱根・竹ノ下の戦い)에서 패했지만, 교토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顯家) 등과 연계해 아시카가군을 물리친다.

『매말론』(梅末論)에 따르면 이때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타카우지와 조기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타카우지는 규슈(九州)로 달아나 이듬해에 규슈에서 체제를 정비하고, 훗날 북조가 되는 지묘인 왕통의 고곤 상황의 인센(院宣)를 얻어 다시 한 번 교토로 진격했다. 타카우지 등이 이끄는 아시카가군은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구스노키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마사시게는 죽고 요시사다는 교토로 도망쳐 왔다.

3. 겐무 신정

겐코(元弘) 3년 6월 5일(1333년7월 17일)에 교토로 돌아온[19] 고다이고 천황은 "지금의 선례들은 옛날에는 새로운 의례였으니, 짐이 행하는 새로운 의례들은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136]라고 선언하고, '''겐무 신정'''을 시작하였다. 겐무 신정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평가와 해석이 있어, 그 특징과 의의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얻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 사상과 그 의의 및 평가에 대해서는 「#평가(동시대)」에서 다룬다.

우선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퇴위와 고곤 천황의 즉위 및 재위를 부정하고, 고곤의 조정에서 이루어졌던 인사들을 모두 무효로 하는 동시에, 막부와 셋칸(摂関)을 모조리 폐지하였다. 또한 양통질립을 폐지하고 왕통을 다이가쿠지토로 단일화하였다. 자신의 친아들로 겐코의 난에 가장 먼저 참전하였던 모리요시 친왕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삼았으나, 몇 달 뒤 해임하였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해서는 전공이 제일이라 하여 자신의 이름자 한 자인 타카(尊)를 하사하여 다카우지(尊氏)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하고,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이나 산기(参議) 등으로 임명하였다.

그 해 중에 기록소 ・ 온쇼보(恩賞方) ・ 잣소케쓰단쇼(雑訴決断所)[137] ・ 무샤도코로(武者所)[138] ・ 구보도코로(窪所) 등의 중요 기관이 재흥 또는 신설되었다. 또한 지방 정권으로써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를 도호쿠(東北) ・ 기타간토(北関東)로( 무쓰 쇼군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가마쿠라에 배치하였다(가마쿠라 쇼군부).

이듬해(1334년) 1월 23일에는 아버지 고우다 천황이 다이가쿠지토의 적류(嫡流)로 지정했던 자신의 조카 구니요시 친왕의 혈통이 아니라 자신의 친아들인 쓰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139]

1334년 1월 29일(1334년3월 5일), 고대 중국 역사상 찬탈자로 꼽히는 왕망(王莽)을 쓰러뜨리고 후한(後漢)을 열었던 광무제(光武帝)의 연호인 건무(建武)에서 따서 연호를 겐무(建武, けんむ)로 바꾸었다.[140]

1334년 5월 3일에는 게비이시초(検非違使庁)에 의한 덕정령(徳政令)인 겐무 덕정령(建武の徳政令)이 발호되고[141] 5월 18일 온쇼보가 재편되었으며[142] 8월에는 잣소케쓰단쇼의 확충[143] 등의 정책이 행해졌다. 또한 경화(硬貨) ・ 저폐(楮幣, 지폐)의 병용이라는 관전(官銭) 건곤통보(乾坤通宝)의 발행을 계획하였으며[144] 나카미카도 노부아키라(中御門宣明)를 주전장관(鋳銭長官) ・ 고조 요리모토(五条頼元)를 주전차관(鋳銭次官)으로 임명하였다.[145] 10월 후반부터 11월 초두 사이에, 모리요시 친왕이 실각하고 그 신병이 가마쿠라의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넘겨졌으며, 친왕은 가마쿠라에 칩거하게 되었다(『매송론』『호랴쿠칸키』『다이조인닛키모쿠로쿠』).[146]

겐무 2년(1335년) 6월 15일에는 조대내리행사소시(造大内裏行事所始), 즉 교토의 황궁인 대내리를 짓는 공사의 첫 삽을 떼는 행사가 행해졌다.[147] 6월 22일, 다이나곤(大納言) 사이온지 긴무네(西園寺公宗)의 모반이 발각되어, 무샤도코로 직원인 구스노키 마사시게 ・ 고 모로나오 등이 포박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148]

4. 평가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겐코의 난(元弘の乱)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평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248] 다만 매송론(梅松論)에 따르면,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로 쫓겨갔을 때 "임금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타카우지 경의 충성 덕분"이라고 언급하며, 천하의 신뢰가 고다이고 천황에게서 타카우지에게로 옮겨갔음을 인식했다.[248] 또한 태평기에는 마사시게가 "교토 안에서 타카우지를 맞아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싸우다 죽으라는 칙명을 내려달라"며 비통해했다는 기록이 있다.[248] 마사시게는 타카우지와의 전쟁의 승패가 인심에 달려 있다고 보았고, 백성이 천황과 겐무 신정에 등을 돌린 상황에서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248]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긍정했다.[249] 고다이고 천황 붕어 백일째에 쓴 「고다이고인(後醍醐院) 백일제 원문」(後醍醐院百ヶ日御願文)에서[250] 고다이고 천황의 업적과 덕을 칭송하고, 자신의 번영이 고다이고 천황의 덕분임을 밝혔다. 가메다 도시카즈(亀田俊和)는 타카우지의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존경이 실체를 동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251] 2010년대 이후 연구에서는 겐무 정권의 정책들이 현실적으로 뛰어났으며, 무로마치 막부도 대부분 이를 계승했다고 재평가한다.[251] 예를 들어, 고다이고 천황은 토지 급부 명령 문서에 추가 문서를 발급하여 오류를 검사하고 강제집행권을 도입하여 약소 무사나 사찰도 안전하게 토지를 수령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는 고 모로나오(高師直)를 통해 타카우지에게 이어져 막부의 기본법 중 하나가 되었다.[251] 가메다는 타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이념과 정책을 충실히 계승했다며, "아시카가 타카우지야말로 고다이고 천황에게 있어서 최대의 충신이었다"고 평가했다.[249]

아시카가 다다요시간노의 소란 당시 남조 측과의 강화 교섭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했다.[252]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아첨하는 신하들을 편애하여 대란을 초래했고, 고묘 천황에게 정식으로 삼종신기를 넘겨받았음에도 독단적으로 요시노에 잠행했다고 비난했다.[253] 또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에게 겐무 신정의 실패를 언급하며 당시 무사들이 겐무 신정을 실패로 여겼음을 시사했다.[253]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가장 뛰어난 천황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255] 그는 고다이고 천황의 학문적 능력과 종교 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고우다 천황 사임 후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 초기 정치를 칭찬했다.[255] 그러나 정치 사상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전면 지지하지 않았다. 특히 겐무 정권의 인사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무사들에게 관위를 남발한 것을 비판했다.[256][258] 하지만 현실주의자였던 지카후사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남조의 지방 지휘관들에게 관위 수여 권한을 부여했으며, 지카후사 자신도 도고쿠 무사들에게 관위 추천서를 남발했다.[261] 이는 남조가 군사적, 영토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무사들의 구심력을 얻기 위한 뛰어난 은상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261]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에 대해 비판했다.[263] 그는 지방 분권 추진, 조세 감면, 은상으로 관위 주는 정책 중단, 공평한 은혜 배분, 사치 자제 등을 요구했다.[265] 사토 신이치(佐藤進一)는 아키이에의 비판에 동의했으나,[266] 가메다 도시카즈는 아키이에의 비판이 반드시 정곡을 찌른 것은 아니었으며, 장기적으로는 효과를 가져온 정책도 있었다고 반박했다.[268]

고다이고 천황 측 공가들은 대부분 겐무 정권에 비판적이었다.[274] 구교들은 '겐무' 연호 사용에 반대했으며,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들이 출가하는 일도 벌어졌다. 『매송론』은 겐무 정권의 혼란상과 공가와 무가의 갈등을 기록하고 있다.

태평기』는 겐무 정권을 "정도가 바르지 못했다"고 서술하며,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반영했다. 도시 주민들의 비판으로는 니조 강변의 낙서가, 지방 주민들의 비판으로는 와카사 국 농민의 문서가 유명하다.

니조 요시모토는 고다이고 천황을 존경했으며,[269] 나카노인 미치후유는 고다이고 천황 붕어 소식에 슬퍼하며 그의 재위 기간 동안의 업적을 칭송했다.[270][254] 『마스카가미』의 저자도 고다이고 천황을 찬미했다.[271][272] 반면 산조 긴카타는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했다.[274]

『태평기』는 고다이고 천황을 처음에는 명군으로 묘사했으나, 겐무 신정 이후에는 암군으로 묘사했다.[275] 가메다 도시카즈는 이러한 『태평기』 사관이 후세 일본에서 고다이고 천황과 겐무 정권에 대한 평가를 고정시켰다고 지적했다.

에도 시대 주자학자와 역사가들은 『태평기』 사관을 이어받아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대일본사》, 아라이 하쿠세키의 『독사여론』, 미야케 간란의 『중흥감언』,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남조 정통 사관을 퍼뜨렸지만, 고다이고 천황에게는 '부덕한 군주'라는 낙인을 찍었다.

메이지 시대에도 『태평기』 사관은 큰 변화가 없었고, 도쿄 제국대학과 교토 제국대학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했다. 1930년대 히라이즈미 기요시가 예외적으로 고다이고 천황을 재평가했지만, 황국사관에 입각한 그의 연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금기시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비판이 시도되었고, 1960년대에는 사토 신이치를 중심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중국 황제를 모방한 독재자였다는 인물상이 제창되었다. 아미노 요시히코는 고다이고 천황을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평가하며 '이형의 왕권' 의론을 주장했다.

1990년대 말부터 고다이고 천황과 겐무 정권에 대한 새로운 연구 흐름이 나타났다. 이치자와 데쓰(市沢哲)와 이토 기요시(伊藤喜良)의 연구는 겐무 정권의 정책이 가마쿠라 시대 후기 조정의 개혁과 연속성이 있으며, 겐무 정권의 여러 기관이 실제로는 정권의 중핵이었다고 재해석했다.

5. 사상과 문화

6. 연표

고다이고 천황의 재위 기간은 하나 이상의 연호(''년호'')로 더 구체적으로 구분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여덟 번의 연호 변경을 경험했는데, 이는 고하나조노 천황의 재위 기간 중 여덟 번의 연호 변경과 숫자만 일치한다.[12]

일본 황실 문장 — 양식화된 국화


'''남북조 시대 이전 조정'''

  • ''분포'' (1317–1319)
  • ''겐오'' (1319–1321)
  • ''겐코'' (1321–1324)
  • ''쇼추'' (1324–1326)
  • ''가랴쿠'' (1326–1329)
  • ''겐토쿠'' (1329–1331)
  • ''겐코'' (1331–1334)
  • ''겐무'' (1334–1336)


'''''남북조 시대 남조'''''

  • 정통한 군주(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라 결정됨)의 조정에서 계산한 연호
  • * ''엔겐'' (1336–1340)


'''''남북조 시대 북조'''''

  • 칭제불명의 군주의 조정에서 계산한 연호(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라 결정됨)
  • * ''쇼케이'' (1332–1338)
  • * ''류쿠오'' (1338–1342)

  • 文保 (1318년2월 26일) - 1319년4월 28일
  • 元応 1319년 4월 28일 - 1321년2월 23일
  • 元亨 1321년 2월 23일 - 1324년12월 9일
  • 정중 1324년 12월 9일 - 1326년4월 26일
  • 嘉暦 1326년 4월 26일 - 1329년8월 29일
  • 元徳 1329년 8월 29일 - 1331년8월 9일
  • 元弘 1331년 8월 9일 - 1334년1월 29일
  • 겐무 1334년 1월 29일 - 1336년2월 29일
  • 延元 1336년 2월 29일 - (1339년8월 26일)

7. 참고 문헌


  • 건무연중행사/『建武年中行事』일본어 (신판은 고단샤 학술문고, 와다 히데마츠 주석·쇼 고 해설)
  • : 한자 가나 혼용문으로 기록된 유직고실서. 후세, 조정에서 활발히 이용되었다. 불명확한 점이 많은 중세 조정 의례에 대해 전하는 사료 중 하나로 유명하다. 『군서류종』 공사부에 수록되어 있다. #조의부흥자 항목도 참조할 것.
  • 증경/『増鏡』일본어
  • 매송론/『梅松論』일본어
  • 태평기/『太平記』일본어
  • 신엽와가집/『神葉和歌集』일본어
  • 존비분맥/『尊卑分脈』일본어
  • 제계도/『帝系図』일본어
  • 본조황인소운록/『本朝皇胤紹運録』일본어
  • 아마노 요시히코/天野, 彦일본어 (1993). 《이형의 왕권/異形の王権일본어》. 헤이본샤 라이브러리. ISBN 978-4582760101. - 원판은 헤이본샤, 1986년.
  • 사토 신이치/佐藤進一일본어 (1965). 《남북조의 혼란/南北朝の動乱일본어》. 일본의 역사 9. 추오코론샤.
  • 무라마츠 고/村松剛일본어 (1978). 《제왕 고다이고 「중세」의 빛과 그림자/帝王後醍醐 「中世」の光と影일본어》. 추오코론샤. ISBN 4120008037.
  • 모리 시게아키/森茂暁일본어 (1980). 《겐무 정권―고다이고 천황의 시대/建武政権―後醍醐天皇の時代일본어》. 교육사 역사 신서―일본사.
  • 모리 시게아키/森茂暁일본어 (1988). 《황자들의 남북조――고다이고 천황의 분신/皇子たちの南北朝――後醍醐天皇の分身일본어》. 중앙공론사. ISBN 978-4121008862.
  • 모리 시게아키/森茂暁일본어 (1991). 《태평기의 군상 군기물어의 허구와 진실/太平記の群像 軍記物語の虚構と真実일본어》. 각가서점. ISBN 978-4047032217.
  • 모리 시게아키/森茂暁일본어 (2000). 《고다이고 천황 남북조 혼란을 수놓은 패왕/後醍醐天皇 南北朝動乱を彩った覇王일본어》. 추코 신쇼. 추오코론 신샤. ISBN 978-4121015211.
  • 히요토 유키/兵藤, 幸일본어 (2018).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일본어》. 이와나미 신쇼. 이와나미 쇼텐. ISBN 978-4004317159.
  • 카메다 토시카즈/亀田, 俊和일본어 (2013). 《무로마치 막부 관령 시행 시스템의 연구/室町幕府管領施行システムの硏究일본어》. 시분가쿠 출판. ISBN 978-4784216758.
  • 카메다 토시카즈/亀田, 俊和일본어 (2014). 《남조의 진실 충신이라는 환상/南朝の真実 忠臣という幻想일본어》. 역사문화라이브러리 378. 기카와코분칸. ISBN 978-4642057783.
  • 카메다 토시카즈/亀田, 俊和일본어 (2015). 《다카모로나오 무로마치 신질서의 창조자/高師直 室町新秩序の創造者일본어》. 역사문화라이브러리 406. 기카와코분칸. ISBN 978-4642058063.
  • 카메다 토시카즈/亀田, 俊和일본어 (2017). 《정이대장군・고량친왕/征夷大将軍・護良親王일본어》. 시리즈・실상에 다가서는 007. 에비스코쇼출판. ISBN 978-4-86403-239-1.
  • 쿠레자 유이치/呉座, 勇一일본어 (2014). 《전쟁의 일본중세사 「게코쿠죠우」는 정말로 있었는가/戦争の日本中世史 「下剋上」は本当にあったのか일본어》. 신초사. ISBN 978-4106037399.
  • 쿠레자 유이치/呉座, 勇一일본어 (2018). 《음모의 일본중세사/陰謀の日本中世史일본어》. 각가신서. 카도카와. ISBN 978-4040821221.
  • 모리 시게아키/森, 茂暁일본어 (2017).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일본어》. 각가선서 583. 카도카와. ISBN 978-4047035935.
  • 모리 시게아키/森, 茂暁일본어 (2019). 《가이랴쿠친왕 날 따라서의 가련한 것만 생각하는 몸에/懐良親王 鄙に従ひの かれん身とぞ 思ひ給ふる일본어》. 미넬바일본평전선. 미넬바서방. ISBN 978-4623087419.
  • 신이 효중/新井, 孝重일본어 (2016). 《고량친왕 무가보다 군의 원망스럽게 건너게 하시는구나/護良親王 武家よりも君の恨めしく渡らせ給ふぞ일본어》. 미넬바일본평전선. 미넬바서방. ISBN 978-4623078202.
  • 오카노 토모히코/岡野, 友彦일본어 (2009). 《키타바타케 신부 대일본은 신국이다/北畠親房 大日本は神国なり일본어》. 미넬바일본평전선. 미넬바서방. ISBN 978-4623055647.

8. 역사적 배경

8. 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쇼추(正中) 원년(1324년) 4월,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에 의해 천황의 측근 히노 스케토모(日野資朝) 등이 처분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쇼추의 변) 주모자 색출 과정에서 정작 최고 주동자였던 천황에 대해서 막부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처분도 하지 않았다.

겐토쿠(元德) 2년(1329년) 6월부터 3년 반에 걸쳐, 중궁 사이온지 기시(西園寺禧子, 후지와라노 기시)의 순산을 비는 기도가 행해졌다.[131] 주된 이유로써는 사이가 좋았던 부부였지만 자식이 없는 것을 부부가 심정적으로 고민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 거론된다.[131]

구니요시 친왕이 사망한 뒤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이치노미야(一宮) 즉 제1왕자인 타카요시 친왕(尊良親王) 등 네 명의 아들이 차기 황태자 후보자로 섰는데,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지묘인 왕통의 적자(嫡子) 가즈히토 친왕(量仁親王)이었으므로, 양위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겐코(元弘) 원년(1331년),측근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의 밀고로 막부 타도 계획이 발각되어 위험이 닥치자 급히 교토 탈출을 결심하고 삼종신기(三種の神器)를 가지고 거병하였다. 처음 히에이잔(比叡山)에 의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사기야마(笠置山)에 농성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막부군 앞에 함락되어 잡힌다. 이것을 겐코의 난(元弘の乱)이라고 부른다. 이때,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의 심문에 대해 「천마의 소행(악마의 짓으로,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이므로 용서해 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에서 도망치자 즉시 폐위하고, 황태자 료닌 친왕(광엄천황)(量仁親王)을 즉위시켰다. 포로가 된 고다이고는 죠큐의 난(承久の乱)의 선례에 따라 반역자로 몰리고, 이듬해 겐코 2년/정경(正慶) 원년(1332년) 오키섬(隠岐島)에 유배되었다.

8. 2. 왕위 계승 문제

다이가쿠지통(大覚寺統) 고우다 천황(後宇多天皇)의 둘째 황자이다. 생모는 내대신(内大臣) 하나잔인 시게쓰구(花山院師継)의 양녀 고쓰지 타다코(五辻忠子)(담텐몬인(談天門院), 친부는 참의(参議) 고쓰지 타다쓰구(五辻忠継))이다. 쇼오응(正応) 원년 11월 2일(1288년 11월 26일)에 태어나, 쇼안(正安) 4년(1302년) 6월 16일에 친왕 선하(親王宣下)를 받았다. 카겐(嘉元) 원년(1303년) 12월 20일에 삼품(三品)에 서품되었고, 카겐 2년(1304년) 3월 7일에는 다이자이슈(大宰帥)가 되어 슈궁(帥宮)이라 불렸다. 또한, 토쿠지(徳治) 2년(1307년) 5월 15일에는 중무경(中務卿)을 겸임했다.

9. 즉위와 겐무 신정

도쿠지 3년(1308년), 지묘인 왕통(持明院統)의 하나조노 천황이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5] 분포 2년 2월 26일(1318년 3월 29일), 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를 받아 31세로 즉위하였고, 3월 29일(4월 30일)에 즉위식을 거행했다.[6] 30대에 즉위한 것은 1068년 고산조 천황이 36세에 즉위한 이후 250년 만이었다.[6]

즉위 후 3년 동안은 아버지 고우다 법황이 인세이(院政)를 실시했다. 고우다 법황의 유조에 따라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는 형인 고니조 천황의 어린 아들 구니요시 친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중계'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128] 그러나 이는 대립 왕통인 지묘인 왕통에서 유래한 문서에서만 보이는 내용으로, 실제로는 그 정도로 약한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겐코 원년(1321년), 고우다 천황은 인세이를 정지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이 개시되었다. 여기에는 고우다 천황이 경도되어 있던 불교 종파 진언종(真言宗)의 수행에 전념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설[129]과, 고다이고 ・ 구니요시에 의한 다이카쿠지 왕통 체계를 확립시켜서 지묘인 왕통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노린 것이었다는 설[130] 등이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고다이고 천황이 치천의 군(治天の君) 즉 인세이를 행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은 고우다 천황의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신임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130][129]

1319년 (''분포 3년 4월''):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통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연호를 ''겐오''로 변경하였다.[7]

1324년,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이 발각되자, 록하라 단다이가 그의 측근 히노 스케토모를 제거하는 이 발생했다.

1331년 겐코 사건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계획은 다시 한번 그의 측근 요시다 사다후사의 배신으로 발각되었다. 그는 재빨리 신성한 보물을 가사기야마(笠置山)(현재 교토부 소라쿠군 가사기町)의 외딴 성에 숨기고 군대를 일으켰지만, 이듬해 성은 막부군에게 함락되었고, 그들은 코곤 천황을 옹립하고 다이고를 오키 국(현재 시마네현의 오키 제도)으로 유배 보냈다.[8] 이는 1221년 조큐 전쟁 이후 고토바 천황이 유배되었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나와 나가토시와 그의 가족의 도움으로 오키에서 탈출하여 호키 국(현재 돗토리현 도하쿠군 코토우라町)의 센조 산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 군대를 찾아 없애라는 명령을 받고 막부에서 파견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천황 편에 서서 록하라 단다이를 사로잡았다. 이 직후,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킨 닛타 요시사다가마쿠라를 포위 공격했다. 마침내 도시가 닛타에게 함락되자, 막부 섭정 호조 다카토키는 토쇼사로 도망쳐 그의 가족 전체와 함께 자결했다. 이로써 호죠의 권력은 끝나고 새로운 군사 정권의 길이 열렸다.[8]

개선하여 교토로 돌아온 다이고는 코곤 천황으로부터 황위를 빼앗고 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겐무 신정은 표면적으로는 옛 방식의 부흥이었지만, 사실 천황은 중국 황제와 같은 황제 독재를 목표로 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중국을 모방하여 동방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급한 개혁, 토지 소유권 분쟁, 보상, 그리고 무사들의 정치 질서 배제는 많은 불만을 야기했고, 그의 정치 질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9. 1. 즉위 과정

고다이고 천황은 쇼오응(正応) 원년 11월 2일(1288년 11월 26일)에 다이가쿠지통(大覚寺統) 고우다 천황(後宇多天皇)의 둘째 황자로 태어났다.[1] 생모는 내대신(内大臣) 하나잔인 시게쓰구(花山院師継)의 양녀 고쓰지 타다코(五辻忠子)(담텐몬인(談天門院))이다. 쇼안(正安) 4년(1302년) 6월 16일에 친왕 선하(親王宣下)를 받았으며, 가겐(嘉元) 원년(1303년) 12월 20일 삼품(三品)에 서품되었다.[1] 도쿠지(德治) 2년(1307년) 5월 15일에는 중무경(中務卿)을 겸임했다.[1]

도쿠지(德治) 3년(1308년)에 지묘인 왕통(持明院統)의 하나조노 천황(花園天皇)이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5] 분포(文保) 2년 2월 26일(1318년 3월 29일), 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를 받아 31세로 즉위하였고, 3월 29일(4월 30일)에 즉위식을 거행했다.[6] 30대에 즉위한 것은 1068년 고산조 천황(後三条天皇)이 36세에 즉위한 이후 250년 만이었다.[6]

즉위 후 3년 동안은 아버지 고우다 법황이 인세이(院政)를 실시했다. 고우다 법황의 유조에 따라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는 형인 고니조 천황(後二條天皇)의 어린 아들 구니요시 친왕(邦良親王)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중계'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128] 그러나 이는 대립 왕통인 지묘인 왕통에서 유래한 문서에서만 보이는 내용으로, 실제로는 그 정도로 약한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겐코(元亨) 원년(1321년), 고우다 천황은 인세이를 정지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이 개시되었다. 여기에는 고우다 천황이 경도되어 있던 불교 종파 진언종(真言宗)의 수행에 전념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설[129]과, 고다이고 ・ 구니요시에 의한 다이카쿠지 왕통 체계를 확립시켜서 지묘인 왕통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노린 것이었다는 설[130] 등이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고다이고 천황이 치천의 군(治天の君) 즉 인세이를 행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은 고우다 천황의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신임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130][129]

겐코(元亨) 2년(1322년), 고다이고 천황이 중궁(中宮)인 사이온지 기시(西園寺禧子)의 산고 기도(御産祈祷)를 명목으로, 가마쿠라 막부에 저주를 걸었다[17]고 전해지지만, 산고 기도는 진실이었다는 설도 있다.

1319년 (''분포 3년 4월''):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통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연호를 ''겐오''로 변경하였다.[7]

9. 2. 겐무 신정의 개요

겐코 3년 6월 5일(1333년7월 17일)에 교토로 돌아온[135] 고다이고 천황은 "지금의 선례들은 옛날에는 새로운 의례였으니, 짐이 행하는 새로운 의례들은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다"[136]라고 선언하며 '''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퇴위와 고곤 천황의 즉위 및 재위를 부정하고, 고곤의 조정에서 이루어졌던 인사들을 모두 무효로 하는 동시에, 막부와 셋칸을 모두 폐지하였다. 또한 양통질립을 폐지하고 왕통을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단일화하였다.[8]

겐코의 난에서 가장 먼저 참전하였던 친아들 모리요시 친왕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삼았으나 몇 달 뒤 해임되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전공이 제일이라 하여 자신의 이름자 한 자인 타카(尊)를 하사하여 타카우지(尊氏)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하고,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이나 산기(参議) 등으로 임명하였다. 그 해 기록소(記録所) ・ 은상방(恩賞方) ・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137] ・ 무사도코로(武者所)[138] ・ 구보도코로(窪所) 등의 중요 기관이 재흥 또는 신설되었다. 지방 정권으로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를 도호쿠(東北) ・ 기타칸토(北関東)로( 무쓰 쇼군부), 아시카가 다다요시가마쿠라(鎌倉)로 배치하였다(가마쿠라 쇼군부).

1334년 1월 23일, 고우다 천황이 다이카쿠지 왕통의 적류(嫡流)로 지정했던 자신의 조카 구니요시 친왕의 혈통이 아니라 자신의 친아들인 쓰네요시 친왕을 황태자로 세웠다.[139] 1월 29일(1334년3월 5일), 왕망(王莽)을 쓰러뜨리고 후한(後漢)을 열었던 광무제(光武帝)의 연호인 건무(建武)에서 따서 연호를 겐무(建武, けんむ)로 바꾸었다.[140]

5월 3일 게비이시초(検非違使庁)에 의한 겐무 덕정령(建武の徳政令)이 발호되고,[141] 5월 18일 은상방(恩賞方)이 재편되었으며,[142] 8월에는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를 확충[143]하는 등의 정책이 행해졌다. 경화(硬貨) ・ 저폐(楮幣)의 병용이라는 관전(官銭) 건곤통보(乾坤通宝)의 발행을 계획하였으며,[144] 나카미카도 노부아키라(中御門宣明)를 주전장관(鋳銭長官) ・ 고조 요리모토(五条頼元)를 주전차관(鋳銭次官)으로 임명하였다.[145] 10월 후반부터 11월 초두 사이, 모리요시 친왕이 실각하고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넘겨져 가마쿠라에 칩거하게 되었다.[146]

1335년 6월 15일에는 교토의 황궁인 대내리(大内裏)를 짓는 공사의 첫 삽을 떼는 행사인 조대내리행사소시(造大内裏行事所始)가 행해졌다.[147] 6월 22일, 다이나곤(大納言) 사이온지 긴무네(西園寺公宗)의 모반이 발각되어, 무사도코로(武者所) 직원인 구스노키 마사시게 ・ 고 모로나오 등이 포박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148]

9. 3. 겐무 신정의 한계와 몰락

겐코 3년(1333년) 6월 5일, 교토로 돌아온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을 개시하였다.[135]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퇴위와 고곤 천황의 즉위 및 재위를 부정하고 고곤의 조정에서 이루어졌던 인사들을 모두 무효로 했으며, 막부와 셋칸(摂関)을 모두 폐지했다. 또한 양통질립을 폐지하고 왕통을 다이카쿠지 왕통으로 단일화했다. 친아들 모리요시 친왕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삼았다가 몇 달 뒤 해임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는 전공이 제일이라 하여 자신의 이름자 한 자인 다카(尊)를 하사하여 다카우지(尊氏)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하고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이나 산기(参議) 등으로 임명하였다.[135] 그 해 기로쿠쇼(記録所) ・ 온쇼보(恩賞方) ・ 잣소케쓰단쇼(雑訴決断所)[137] ・ 무샤도코로(武者所)[138] ・ 구보도코로(窪所) 등의 중요 기관이 재흥 또는 신설되었다. 지방 정권으로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를 도호쿠(東北) ・ 기타간토(北関東)로(무쓰 쇼군후),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가마쿠라(鎌倉)로 배치하였다(가마쿠라 쇼군후).[135]

1334년 1월 23일,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조카 구니요시 친왕이 아닌 친아들 쓰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139] 29일(1334년 3월 5일)에는 왕망(王莽)을 쓰러뜨리고 후한(後漢)을 열었던 광무제(光武帝)의 연호인 건무(建武)에서 따서 연호를 겐무(建武, けんむ)로 바꾸었다.[140] 5월 3일에는 겐무 덕정령(建武の徳政令)이 발호되고[141] 5월 18일 온쇼보가 재편되었으며,[142] 8월에는 잣소케쓰단쇼가 확충되는[143] 등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다. 경화(硬貨) ・ 저폐(楮幣, 지폐)의 병용이라는 관전(官銭) 건곤통보(乾坤通宝)의 발행을 계획하고[144] 나카미카도 노부아키라(中御門宣明)를 주전장관(鋳銭長官) ・ 고조 요리모토(五条頼元)를 주전차관(鋳銭次官)으로 임명하였다.[145] 10월 후반에서 11월 초두 사이에는 모리요시 친왕이 실각하고 가마쿠라의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신병이 넘겨졌다.[146]

겐무 2년(1335년) 6월 15일에는 교토 황궁인 대내리를 짓는 공사의 첫 삽을 떼는 행사가 행해졌다.[147] 6월 22일에는 다이나곤(大納言) 사이온지 긴무네(西園寺公宗)의 모반이 발각되기도 하였다.[148]

같은 해,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가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러 칙허 없이 간토 지방으로 향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난의 진압을 수행했던 장수와 사졸들에게 가마쿠라에서 독자적으로 은상 지급을 행했다. 이는 겐무 신정에 대한 이반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추토를 명했다.[30] 요시사다는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했지만, 교토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연계해 아시카가군을 물리쳤다.[30]

『매송론』에 따르면, 이때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다카우지와 조기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구게(公家)들의 반대로 각하되었다.

다카우지는 규슈(九州)로 달아나 이듬해에 규슈에서 체제를 정비하고, 훗날 북조가 되는 지묘인 왕통의 고곤 상황의 인센(院宣)을 얻어 다시 한 번 교토로 진격했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닛타-구스노키 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마사시게는 죽고 요시사다는 교토로 도망쳐 왔다.

10. 남북조 시대

아시카가 군이 교토로 들어오자,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산으로 피신해 저항했지만, 아시카가 측의 화친 요청에 따라 삼종신기를 넘겨주었다.[8] 아시카가 다카우지고곤 상황이 인세이를 행하는 형식으로 지묘인 왕통에서 고묘 천황을 새 천황으로 옹립하고, 겐무 시키모쿠를 제정하여 교토에 새로이 바쿠후를 열었다.[8] 한편, 《태평기》에 따르면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에서 내려올 때 쓰네요시 친왕에게 양위했다.

폐위된 고다이고 천황은 유폐되어 있던 가잔인(花山院)에서 도망쳐, 다카우지에게 넘겨주었던 신기는 가짜라 주장하며 요시노(吉野)에 자신이 주재하는 조정을 세웠다.[149] 이로써 교토의 조정(북조)과 요시노의 조정(남조)이 병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8]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 북조 측에 맞서려 했다. 가네요시 친왕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규슈로, 무네요시 친왕(宗良親王)은 도고쿠, 노리요시 친왕은 오슈로 보냈다.[8] 하지만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져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 8월 15일에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했다.[9] 다음 날, 요시노의 금륜왕사(金輪王寺)에서 붕어했다.[10] 향년 52세(만 50세)였다.

셋쓰국의 스미요시 행궁(住吉行宮)에 있던 고무라카미 천황은 남조 측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의 궁사(宮司)인 쓰마모리 씨(津守氏) 집안이 맡고 있던 사찰인 장엄정토사(莊嚴淨土寺)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대법요(大法要)를 실시했다. 북조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고자 교토에 덴류사(天竜寺)를 지었다.

10. 1. 남조의 성립

아시카가 군이 교토로 들어오자,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산으로 피신해 저항했지만, 아시카가 측의 화친 요청에 따라 삼종신기를 넘겨주었다.[8] 아시카가 다카우지고곤 상황이 인세이를 행하는 형식으로 지묘인 왕통에서 고묘 천황을 새 천황으로 옹립하고, 겐무 시키모쿠를 제정하여 교토에 새로이 바쿠후를 열었다.[8] 한편, 《태평기》에 따르면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에서 내려올 때 쓰네요시 친왕에게 양위했다.

폐위된 고다이고 천황은 유폐되어 있던 가잔인(花山院)에서 도망쳐, 다카우지에게 넘겨주었던 신기는 가짜라 주장하며 요시노(吉野)에 자신이 주재하는 조정을 세웠다.[149] 이로써 교토의 조정(북조)과 요시노의 조정(남조)이 병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8]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 북조 측에 맞서려 했다. 가네요시 친왕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규슈로, 무네요시 친왕(宗良親王)은 도고쿠, 노리요시 친왕은 오슈로 보냈다.[8] 하지만 열세를 뒤집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져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 8월 15일에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했다.[9] 다음 날, 요시노의 금륜왕사(金輪王寺)에서 붕어했다.[10] 향년 52세(만 50세)였다.

셋쓰국의 스미요시 행궁(住吉行宮)에 있던 고무라카미 천황은 남조 측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의 궁사(宮司)인 쓰마모리 씨(津守氏) 집안이 맡고 있던 사찰인 장엄정토사(莊嚴淨土寺)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대법요(大法要)를 실시했다. 북조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고자 교토에 덴류사(天竜寺)를 지었다.

10. 2. 고다이고 천황의 노력과 붕어

1308년, 고니조 천황의 서거로 하나조노 천황이 즉위하고, 고우다 천황의 둘째 아들 다카하루 친왕이 황태자이자 섭정으로 책봉되었다.[5] 1318년, 하나조노 천황이 퇴위하고 다카하루 친왕이 고다이고 천황으로 즉위하였다.[6] 1319년, 연호를 겐오로 변경하며 통치 시작을 알렸다.[7]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계획했으나, 1324년 쇼츄 사건과 1331년 겐코 사건으로 발각되었다.[8] 겐코 사건 당시, 신성한 보물을 가사기야마에 숨기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막부군에게 함락되어 오키 국으로 유배되었다.[8] 1333년, 나와 나가토시 등의 도움으로 오키를 탈출, 호키 국 센죠 산에서 군사를 일으켰다.[8]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군을 배신하고 천황 편에 서서 록하라 단다이를 함락시켰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함락시켜 막부가 멸망했다.[8]

겐무 신정을 시작한 고다이고 천황은 황제 독재를 목표로 했으나, 성급한 개혁과 무사들의 불만으로 정치 질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8] 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나카센다이 반란 진압 후 불만을 품자, 닛타 요시사다에게 추적을 명했으나 실패했다.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키타바타케 아키에가 아시카가 군대를 격파했지만, 다카우지는 규슈에서 군대를 재편하여 다시 교토로 진격했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쿠스노키 군대가 패배하고, 아시카가 군대가 교토에 입성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산으로 피신했다가 화해의 의미로 황실의 보물을 넘겨주었다.[8] 그러나 다카우지는 코묘 천황을 옹립하고 겐무 법전 제정과 함께 막부를 시작했다.[8]

1337년 1월, 고다이고 천황은 수도에서 탈출하여 요시노남조를 세우고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8] 이때 넘겨준 보물은 위조품이었다.[8] 고다이고 천황은 아들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북조에 대항하도록 했다.

랴쿠오 2년(1339년) 8월 15일, 고다이고 천황은 아들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하고,[9] 다음 날인 8월 16일에 붕어하였다.[10] 궁내청은 고다이고 천황의 을 ''토노오노 미사사기''로 지정했다.[11] 세쓰국의 스미요시 행궁에 있던 고무라카미 천황은 남조 측 스미요시타이샤 궁사인 쓰모리 씨의 쇼곤 죠토지에서 대법요를 거행했고,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추모하여 교토에 텐류지를 건립하였다.

11. 사상과 문화적 업적

11. 1. 유학

고다이고 천황은 무라사키 시키부의 소설 『겐지모노가타리(11세기 초) 연구에 힘썼다. 정가본 원씨이야기(定家本源氏物語)와 가와치방(河内方)의 주석서 『수원초(水原抄)』를 탐독하며 자신의 견해를 여백에 적었다.

겐무 신정 초기에는 공무의 틈을 타 가와치방 연구자인 기우(行阿)에게 『가와치본 원씨이야기』(河内本源氏物語)를 헌상하게 하고, 원씨이야기 등장인물의 계보를 직접 작성하는 등 『원씨이야기』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다이고 천황의 연구 성과는 적손인 조케이 천황에게 계승되었고, 조케이는 『원씨이야기』 주석서 『센겐초(仙源抄)』를 저술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의 제자뻘 되는 시토우지 요시나리(四辻善成)의 『가와이초(河海抄)』는 『원씨이야기』의 기존 연구를 집대성한 연구서로, "엔기 덴랴쿠 준거설(延喜天暦準拠説)"을 주장했다. 이는 등장인물인 키리츠보테이(桐壺帝)·스자쿠테이(朱雀帝)·레이젠테이(冷泉帝)를 실존 인물인 다이고 천황·스자쿠 천황·무라카미 천황에 연결시켜, 『원씨이야기』가 "엔기·덴랴쿠의 치(延喜・天暦の治)"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해석하려 한 것이다.

국문학 연구자 가토 요우스케(加藤洋介)는 「『원씨이야기』 엔기 덴랴쿠 준거설」이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고다이고 천황은 엔기·덴랴쿠의 치(延喜・天暦の治)를 이상으로 내걸었다.
  • 고다이고 천황은 타마바 다다모리(丹波忠守)로부터 『시메이초(紫明抄)』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 조케이 천황의 『센겐초(仙源抄)』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연구 성과가 기록되어 있는데, 시토우지 요시나리(四辻善成)의 『산호비쇼(珊瑚秘抄)』 해석과 일치한다.
  • 시토우지 요시나리(四辻善成)는 고다이고 천황의 『원씨이야기』 강의를 무라카미 천황이 나시츠보의 5인(梨壺の五人)을 편성한 사업에 비유하며, 고다이고와 엔기 덴랴쿠의 치를 연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고다이고 천황이 고안한 「『원씨이야기』 엔기 덴랴쿠 준거설」은 타마바 다다모리(丹波忠守)를 통해 시토우지 요시나리(四辻善成)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다이고 천황에게 『원씨이야기』 연구는 왕권 회복 사업의 일부였으며, 시토우지 요시나리(四辻善成)의 『가와이초(河海抄)』는 겐무 정권의 성격을 이해해야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森茂暁)도 가토의 논설에 동의하고 있다.

11. 2. 신도

고다이고 천황은 다이카쿠지통의 관례에 따라 이세 신궁을 보호하고, 외궁(外宮)의 도아이케 유키로부터 이세 신도를 배웠다.[230] 이 인연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도 이세 신도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 등에 표현하는 등, 일본의 철학, 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230]

이세 신궁은 고대 일본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졌으나, 율령제 붕괴와 하치만 궁 ・ 구마노 신사의 대두로 중세에는 그 권세를 잃고 있었다.[230] 이에 외궁의 와타라이 씨는 이세 신궁의 독자성을 지키고자 독특한 신도관을 형성하였다.[230] 지묘인통의 천황들이 사이오 제도를 무시하여 이세 신궁이 타격을 입고 천황가와의 연줄도 잃게 된 가운데, 다이카쿠지통의 천황들은 사이오 제도를 존중하였고, 와타라이 씨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비전(秘伝)으로 내려오던 이세 신토 서적들을 바쳤다. 오카노 도모히코는 일본 신토의 전통 신들이 부처의 화신이라는 본지수적과는 반대로, 일본의 전통 신들이 본체이고 부처가 그 신들의 화신이라고 하는 이세 신토 고유의 신도 우위주의가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자립하고자 하는 다이카쿠지통의 사상과 상통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와타라이 씨는 1332년까지 고다이고 천황과 그의 아버지 고우다 법황에게 와타라이 이에유키가 편찬한 『류취신기본원』을 헌상하였고, 부자 모두 이 책을 열람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1330년사이온지 기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겐시 내친왕을 이세 신궁의 사이오로 보냈으나, 곧 겐코의 난으로 오키로 유배되어 겐시 내친왕이 이세에 가는 일은 없었다. 1333년 겐무 신정을 시작한 고다이고 천황은 아노 렌시와의 사이에서 둔 딸 쇼시 내친왕을 다시 사이오로 보냈으나, 겐무의 난으로 겐무 정권이 붕괴되어 쇼시 내친왕은 역사상 마지막 사이오가 되었다.

1336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무네요시 친왕을 받들고 이세국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지카후사가 의지한 인물이 와타라이 이에유키였다. 지카후사는 이에유키로부터 이세 신토를 배웠고, 1337년 이후 『류취신기본원』을 필사했다. 이후 지카후사의 저작들에는 이세 신토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230]

오가사와라 하루오는 이 시기 와타라이 이에유키, 도아이 쓰네마사,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승려 지헨 등의 학파 활동을 "일본 신토 역사상 획기적인 하나의 출발"이라고 평가하며, 후세 일본 신토에 큰 영향이 있었다고 서술하였다.[231]

고다이고 천황과 이세 신토의 결탁은 남조의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공헌하여, 기타바타케 집안은 이세 신궁의 지원을 받아 이세 국에서 기반을 쌓고 센고쿠 시대 말기까지 이세 고쿠시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한편, 이세 신궁의 모두가 남조에 협력한 것은 아니었고, 북조 편에 선 신주(神主)도 있었다.

11. 3. 불교

고다이고 천황은 양통질립 시기(1242년 - 1392년)에 선종을 비호한 천황이었다.[210] 특히 임제종을 중시하여 많은 국사(国師) 칭호를 수여했다.[211] 고사가 천황에서 고가메야마 천황에 이르는 치세까지 불교 승려에게 내려진 국사 칭호는 총 25회였으며, 그 가운데 20회가 임제종 선종 승려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이 시기 동안 총 12회의 국사 칭호 수여를 행하였고, 이 가운데 10회가 임제종에 대한 것이었다.[210] 이는 당시 모든 천황이 행한 선종 진흥 사업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치이다.[210]

중세 일본에서 천태종(天台宗)이나 진언종(真言宗)과 같은 기존 불교는 학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고귀한 집안 출신의 승려만이 요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212] 반면 선종(禅宗)이나 율종(律宗) 승려들은 계율을 중시하여 신분은 낮았지만 무가나 대중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었다.[212] 고다이고 천황이 속한 다이카쿠지 왕통(大覚寺統) 또한 선종에 주목하였는데,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은 교토 난젠지(南禅寺)를 열었고, 고우다 천황(後宇多天皇)(고다이고 천황의 아버지)은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난젠지에 가마쿠라 5산(鎌倉五山)에 준하는 사격(寺格)을 인정받았다.[213] 고다이고 천황의 선종 진흥은 부친과 조부의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었다.[213]

고다이고 천황이 임제종에 대해 임명한 국사는 다음과 같다.

  • 야쿠오 톳켄(約翁徳倹, 겐오 2년(1320년) 4월 8일[214]) - 「불등대광국사」(仏燈大光国師)[215]
  • 무칸 겐오(無関玄悟, 겐코 3년(1323년) 12월 12일) - 「대명국사」(大明国師)[215]
  • 센케이 쇼켄(潜渓処謙, 가레키 3년(1328년) 10월 15일) - 「보원국사」(普円国師)[215]
  • 기안 소엔(規庵祖円, 가레키 3년(1328년) 11월) - 「남원국사」(南院国師)[215]
  • 무혼 가쿠신(無本覚心, 겐토쿠 2년(1330년) 가을) - 「원명국사」(円明国師)[215]
  •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겐무 2년(1335년) 10월 ) - 「무소 국사」(夢窓国師)[215]
  • 고호 가쿠묘(孤峯覚明, 겐무 2년(1335년) 10월 5일) - 「국제국사」(国済国師)[215] (고다이고 천황은 겐코의 난에서 오키 국(隠岐国)을 탈출한 직후인 윤2월 28일에 당시 이즈모(出雲)에 있던 고호 가쿠묘를 불러 면회하였다.[216])
  • 슈호 묘쵸(宗峰妙超, 엔겐 4년/랴쿠오 2년(1339년) 4월 17日) - 「고조정등국사」(高照正燈国師)[215] (「흥선대등국사」(興善大燈国師) 약칭 「대등국사」(大燈国師)로 통칭되는 쪽이 저명하다.)
  • 슈호 묘쵸(시기 불명) - 「정등국사」(正燈国師)[215] (앞서 항목에 포함시킨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두 번 수여받았다.)
  • 도오 쿄엔(通翁鏡円, 시기 불명) - 「보조대광국사」(普照大光国師)[215]


고다이고 천황은 고산 문학(五山文学)의 기수이자 유학자 ・ 수학자로 알려진 승려 쥬간 엔게쓰(中巌円月)를 불러들여 『상건무천자표』(上建武天子表), 『원민』(原民), 『원승』(原僧)이라는 정치론을 헌정받았다.[41] 또한 겐토쿠(元徳) 2년(1330년)에는 원나라(元)로부터 온 승려 민키 소슌(明極楚俊)을 불러 대면했는데, 이는 당시 천황이 외국인과 직접 만나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213] 민키 외에 원의 임제종 승려로써 세이세쓰 쇼쵸(清拙正澄)도 중용되었다.[213]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무몬 겐센(無文元選)은 임제종의 고승으로 도토미 국(遠江国) 호코지(方広寺)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어 「성감국사」(聖鑑国師), 「원명대사」(円明大師)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42]

사학자 가와세 가즈마(川瀬一馬)는 무소 소세키(夢窓疎石)가 난젠지 주지를 고사하였을 때 고다이고 천황이 「불법의 융성하고 그렇지 못하고는 사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열의를 가지고 설득한 고사를 들어, 선종이 가마쿠라 시대에도 멸망하지 않고 그 뒤로도 이어지게 된 것은 이 시기 고다이고 천황의 인선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43] 또한 이후의 무가 사상이나 무가 문화가 선종에 뿌리를 두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분야에 있어서 고다이고 천황의 영향도 적지 않다고 보았다.[43]

사학자 오쓰카 노리히로(大塚紀弘)는 선종 흥행은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모으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컸으며, 선종에 대한 어느 정도의 귀의는 했다고 해도 기본 노선으로써는 밀교(密教) 쪽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213] 우치다 게이이치(内田啓一)는 구카이(空海)를 정점으로 하는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던 진언밀교에 대해 고다이고 천황의 시점에서는 임제종 선은 「작은 삼각형」의 결집체로 보였으며, 그 각 삼각형의 정점에 국사의 칭호를 주는 것으로 선종계의 장악을 도모하였던 것은 아닐까 해석하였다.[220]

호타테 미치히사(保立道久)는 종교계의 융성이나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던 것으로 고다이고 천황은 어쩌면 국가 통치의 상징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선종을 파악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해석하였고, 일본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2018년, 호타테 미치히사는 고다이고 천황의 선종 정책에서 그가 융화 노선을 지향하는 정치가임을 알 수 있으며, 양통질립을 우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선종을 활용하고자 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 선종 정책은 역사적 의의로써도 가마쿠라 시대 → 겐무 정권 →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江戸幕府)라는 일본사의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공무(公武)를 초월한 국가 통치의 틀로써 고다이고 천황이 구체적으로 선종을 제시하였기에 그 뒤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500년 이상 이어져온 일본의 이른바 '무가 선종 국가'(武家禪宗国家) 체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였다.

지묘인 왕통에서도 예외적으로 가잔 천황(花園天皇)은 선종에 깊이 귀의하여 특히 다이토쿠지(大徳寺)의 슈호 묘쵸(宗峰妙超)를 숭경하였다.[221] 고다이고 천황측도 가잔 천황의 자세에 호의를 품었고 가잔 천황을 따라 다이토쿠지와 슈호 묘쵸를 독실히 공경하였으며 두 천황 모두 다이토쿠지를 기원소(祈願所)로 선정한다.[221] 그 뒤,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교토로 돌아와 겐무 신정을 개시한 바로 다음날인 겐코 3년/쇼쿄 2년(1333년) 6월 7일에 다이토쿠지에 「다이토쿠지 영지의 일은 관령함에 서로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윤지를 내린다.[216] 이후로도 종종 다이토쿠지는 소유 영지 기진 등을 으레 받았으며, 그 극진함은 진언율종(真言律宗)의 본거지 사이다이지(西大寺)[222]와 나란히 설 정도였다고 한다.[216] 같은 해 8월 24일에는 고다이고 천황 자신이 직접 쓴 치문(置文)으로 「다이토쿠 선사(大徳禅寺)는 마땅히 본조에 비길 데 없는 선종의 원림(苑林)이라」,「문도 제자가 서로 잇는 것은 다른 문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라 써서 다이토쿠지가 일본 최고의 선사(禅寺)라는 것을 선언하였으며,[216] 10월 1일에는 정식으로 윤지를 내려 「5산의 으뜸」이 되었다.[216] 이듬해 1월 26일에 고다이고 천황은 난젠지(南禅寺)[223]를 교토 5산(京都五山)의 제일로 정하고, 이틀 뒤인 28일에 다시금 다이토쿠지를 난젠지와 나란히 그 사격(寺格)을 정하고 「남종 단전의 정량」이라 칭하였다.[216]

다이토쿠지에 대한 사찰 소유 영지 안도 시기(6월 7일)는 지묘인 왕통으로의 왕가 소유 영지 안도의 시기와 같은 날이다.[224]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연동되는 정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24]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일찍이 가잔 상황이 다이토쿠지의 슈호 묘쵸에게 기진하고 있던 무로마치인(室町院) 소유 영지 「도모노 장(伴野床) ・ 가쓰니시 미하야(葛西御厨)」의 안도에 대해서는 가잔 천황으로부터의 다이토쿠지로의 기진을 고후시미 천황(後伏見上皇)에게 확인시킨다, 라는 번잡한 수속을 밟아서 행한 것이었다.[224] 이 조치에 의해 다이토쿠지가 다시금 다이가쿠지 왕통과 지묘인 왕통 양측으로부터 숭경을 받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224] 무로마치인 소유의 영지는 원래부터 다이카쿠지 왕통 ・ 지묘인 왕통이라는 천황가 내부의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던 장원들이었으므로 이들이 다이토쿠지라는 종교적 ・ 중립적인 조직에 붙여진 것에 대한 의미는 크다.[224]。즉 고다이고 천황은 지묘인 왕통과의 융화 노선을 목표로 공가일통(公家一統)의 상징으로써 다이토쿠지를 전면에 세우고 있었다.[224]

고다이고 천황은 실제의 사찰 조영이나 사찰 부지 확보에 있어서도 다른 불교 종파와의 분쟁을 야기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부심한 흔적이 엿보인다.[225] 예를 들면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 시기에 다이토쿠지에 제공한 사찰 권역은 천태종(天台宗) 사찰인 엔류인(円融院) ・ 가지이몬제키(梶井門跡) 수준에 달하는 것이었다.[225] 여기서 당시의 가지이 몬제키를 관령하고 있던 것은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로 천태좌주(天台座主)였던 소초 법친왕(尊澄法親王), 훗날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는 무네요시 친왕(宗良親王)이었다.[225] 소초 법친왕(무네요시 친왕)은 겐코의 난 이전, 자신과 관련이 있는 선지사(善持寺)라는 사원의 토지가 개당된지 얼마되지 않은 다이토쿠지로 유입되어 버린 것에 대한 건을 흔쾌히 승낙하기도 하는 등,[226][225] 엔랴쿠지(延暦寺)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승려이면서 선종에도 이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수도 교토에 새로이 대규모의 선종 사원을 짓고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인맥에 의해 가장 강한 장애물로 여겨지고 있던 불교계의 구세력 천태종과의 알력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다.[225] 이후 고다이고의 융화적인 자세는 겐무 정권 시기 내내 일관된 것이었다고 보이며, 겐무 원년(1334년) 10월 20일 윤지에서 다시금 부지 확인이 행해졌다.[225]

겐무의 난으로 겐무 정권이 붕괴하면서 고다이고 천황의 유화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225] 그렇다고 해도 역사적인 의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며, 고다이고 천황의 선종 정책은 그 뒤의 일본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227]

송학(宋学, 신유학)은 종종, 주자학(朱子学)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이 시대의 송학은 선종과는 뗄 수 없는 일체적인 것이었다.[227] 가마쿠라 시대, 일본이 몽골 제국의 위협에 노출되자, 공무(公武)의 각 유식자는 그때까지의 민족주의를 버리고 일본의 근대화를 도모하였으며 송학과 선종이 일체화된 사상을 남송의 선종 승려였던 부쥰 시한(無準師範)의 문하나 남송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온 승려 란케이 도류(蘭渓道隆)를 통해 배웠다.[227] 이 시점에서는 선종 ・ 송학은 여러 세력들에 의해 제각기 배우던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처음으로 선종국가라는 하나의 그림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으며,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써 사용되었던 것으로 그 뒤의 융성이 보증되게 되었던 것이다.[227] 호타테에 따르면 고다이고 천황의 초상화가 율종의 사이다이지(西大寺) 출신의 몬칸과 선종의 다이토쿠지에 의해 소장되었던 점이 그 단적인 상징은 아닐까, 라고 하였다.[227]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은 겐무 정권 붕괴 이후에도 아시카가 정권에 의해 무가 선종 국가로써 발전적으로 이어지게 된다.[227]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 형제에 의해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덴류지(天龍寺)가 창건된 것은 너무도 유명한 것으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또한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재각이 발굴된 선종 승려 무소 소세키를 명목상의 개산으로 삼고 쇼고쿠지(相国寺)를 건립하고 있다.[227] 이에 의해 아시카가 씨 정권이 선종 ・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위치시키고 그것도 선종 사원이 종교상 뿐만 아니라 경제적 ・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겐무 정권으로부터의 연속성을 부정할 수 없다.[227] 그 뒤 무가 선종 국가는 에도 막부가 붕괴되기까지 500년 이상 이어지게 되는데, 「선종은 무가의 것」이라는 인식은 에도 막부가 선종을 심화시키는 것을 과거소급적으로 적용시킨 이해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공무를 초월한 국가적인 사업에 선종을 다룬 고다이고 천황이야말로 무가 선종 국가의 성립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하였다.[227]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인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은 진언율종(真言律宗)의 개조(開祖)인 에이손(叡尊)에 깊이 귀의하였는데, 고다이고 또한 율종의 진흥을 도모하였다. 율종은 계율(戒律, 불교에 있어서 규율 ・ 규범)을 중시하여 부흥을 도모하고, 석가모니문수보살(文殊菩薩) ・ 불사리(舎利,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고 황폐화된 사원을 부흥시켜 다양한 불상을 조성하며, 대중과의 관계성을 중시하고 빈민 구제 등의 자선 사업을 활발히 행하였다.[228]

고다이고 천황은 가레키 3년(1328년) 5월 26일부터 겐토쿠(元徳) 2년(1330년)까지 3년 동안 진언율종의 승려 닌쇼(忍性)에게 「닌쇼 보살」(忍性菩薩), 신쿠(信空)에게 「자진화상」(慈真和尚), 도쇼다이지(唐招提寺)의 중흥조(中興祖) 가쿠죠(覚盛)에게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들은 모두 진언종(真言宗)의 고승들로 진언율종 출신이자 고다이고 자신의 복심이기도 했던 몬칸(文観房弘真)의 추거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닌쇼는 빈민이나 한센병 환자, 히닌(非人)이라 불리던 피차별대상자들에 대한 구제에 생애를 바친 율승(律僧)이었다.[45]

고다이고 천황은 명예직을 추증하는 것뿐 아니라 일본 각지 율종의 민중 구제 사업에 대한 지원도 보였다. 예를 들어 동부 하리마 국(播磨, 효고 현 동부)에서는 가코 강(加古川) 수계의 고가이 용수(五ヶ井用水)에 대해 중세에 몇 번에 걸쳐 대규모 치수 사업이 이루어졌는데, 가고가와 오제키(加古川大堰)라 불리는 대규모 방죽이 1989년 완성되기까지 지역의 부를 만들어내는 심장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46] 일본의 역사학자 가네코 데쓰(金子哲)는 당대의 기록들을 조사하여 이 사업은 당시 겨우 20대 후반에서 30대 정도였던 몬칸에 의해 개시된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같은 시기 그 지역에 몬칸에 의해 세워졌던 석탑들이 다이카쿠지 통(大覚寺統)의 세력 범위 내에 있어 「전륜성왕(金輪聖王, 천황) 운운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에서 이러한 사업들은 고우다 천황(後宇多上皇, 고다이고 천황의 아버지)이나 당시 황태자(皇太子)의 신분이었던 다카하루 친왕(즉 고다이고 본인)으로부터의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고 추측하였다.[46]

11. 4. 와카(和歌)

고다이고 천황은 와카에도 조예가 깊었다. 『신후찬화가집(新後撰和歌集)』부터 『신후습유화가집(新後拾遺和歌集)』에 이르는 7종의 칙찬와가집(勅撰和歌集)에 고다이고 천황의 와카가 많이 실려 있다. 제16 칙찬 와카 모음집인 『속후습유화가집(続後拾遺和歌集)』(가랴쿠 원년(1326년) 6월 9일 반납)은 고다이고 천황이 니조 다메사다(二条為定)를 찬자로 하여 칙선한 것이다.[240]

고다이고 천황은 당시 일본 상류 계급에게 있어 정통 문예였던 와카를 비호한 유력한 후원자였으며, 《마스카가미(増鏡)》 제13 「가을 산(秋のみ山)」에도 "당대(고다이고 천황) 또한 시키시마(敷島)의 도(道, 일본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와카의 도)를 중히 여기시니"(当代もまた敷島の道もてなさせ給)라고 칭송받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 와카는 단순한 문예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여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강력한 정치 도구이기도 했다.

일본 가학(歌学)에서의 업적으로는, 당시 지묘인 왕통(持明院統) 파벌이던 교고쿠파(京極派)에 밀리고 있던 니조파(二条派)를 다이카쿠지 왕통(大覚寺統)의 군주로서 부흥시켰다. 『속후습유화가집』의 찬자로 니조파의 다메사다를 채용한 것이 그 예이다.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미코히다리류(御子左流)는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 등을 배출한 일본 가학의 가계이지만, 당시 일본 가단은 니조파와 교고쿠파로 양분되어 있었다.[242] 고다이고 천황은 니조파 중에서도 니조 다메요(二条為世)보다 그의 차남으로 유학적 색채가 짙었던 니조 다메후지(二条為藤)의 와카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고다이고 천황은 혼맥으로도 미코히다리 류(御子左流) 니조 집안을 우대하였고, 니조 다메코(二条為子)를 측실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니조 다메코와의 사이에서 다카요시 친왕(尊良親王) 및 무네요시 친왕(宗良親王)을 얻었다.

《신후습유화가집》에서 발탁된 무가 가인(武家歌人)으로 당시에는 아직 「다카우지(高氏)」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던 젊은 날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도 있었다. 쇼추(正中) 2년(1325년)이라는 시기는 쇼추의 변(正中の変)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막부 전복 계획이 발각되고 천황 자신의 측근이라 할 인물들을 많이 잃었던 이듬해에 해당하며, 다카우지의 와카가 채용된 것은 고다이고 천황의 입장에서 자신의 눈에 들고자 하는 무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조금이라도 반막 세력을 늘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에게 승리하고 쇼군 친정을 시작한 다카우지는 막부 ・ 북조 안정책의 일환으로써 북조의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에게 『신천재화가집(新千載和歌集)』을 집주했다. 여기서 다카우지는 자신이 처음으로 입선한 『속후습유화가집』의 찬자 니조 다메사다를 다시금 찬자로 추천했다.[245]

고다이고 천황의 니조파는 최종적으로 교고쿠파에 승리했고, 교고쿠파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중기에 소멸했지만, 니조파는 살아남아 근세인 에도 시대(江戸時代)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242]

11. 5. 비파(琵琶)

고다이고 천황은 피리를 아와타구치 쓰네후사(粟田口嗣房)에게서, 쓰구후사 사후에는 그의 사촌인 후지이 쓰네사네(藤井嗣実)에게서 배웠다. 비곡(秘曲)은 지하가쿠닌(地下楽人)인 오오가미 가게미츠(大神景光)에게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악곡(舞楽曲) "라료왕(羅陵王)"의 일부인 비곡 "아라조(荒序)"를 애호하여 자주 연주했는데, 이 곡은 평상시에는 태평성대를 축하하고 비상시에는 승리를 부르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비파(琵琶) 연주에도 적극적이었던 고다이고 천황은 니시존지 사네카네(西園寺実兼)에게 간청하여 1319년 비곡 자존만추락(慈尊万秋楽)과 양진조(揚真操)를, 1321년에는 석상류천(石上流泉)과 조하라 석상류천(上原石上流泉)을 전수받았다. 1322년에는 비곡 탁목(啄木)을 이마데가와 카네스에(今出川兼季)에게서 전수받았다. 이때 사용한 비파는 황실의 명기(名器) "겐죠(玄上)"였다. 1328년에는 지묘인토(持明院統)에서 천황만이 전수받을 수 있었던 "탁목"의 譜外口伝(악보 밖의 구전)을 가네스에에게서 전수받았는데, 이는 지묘인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고후시미 상황(後伏見上皇)은 이를 두고 지묘인토의 비전이 고다이고 천황에게 빼앗겼다고 한탄했다.

아야노코지 아리아야스(綾小路有頼)에게서 사이바라쿠(催馬楽)의 비곡을, 니조 스케치카(二条資親)에게서 신가쿠(神楽)의 비곡을 전수받는 등, 고다이고 천황은 각종 음악의 오의를 적극적으로 익혔다. 니시존지가(西園寺家), 병등원(平等院), 도다이지(東大寺)쇼소인(正倉院)에서 명기를 징발하여 소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양통협립(両統迭立) 이후 다이가쿠지토(大覚寺統)와 지묘인토가 독자적으로 쌓아 올린 궁정 음악을 통일하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원홍의 난 당시 가사기야마 전투에서 패배하여 막부에 잡힌 고다이고 천황은 1332년 2월경까지 로쿠하라에 갇혀 있었다. 이때 중궁인 니시젠지 기시는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이 애용하던 비파를 보냈고, 고다이고 천황은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비파의 명수로 알려져 있으며, 의 명인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그의 기량을 칭찬했다.

11. 6. 서예

고다이고 천황은 화풍(和風)이라는 고유 일본 양식에 중국의 송풍(宋風)으로부터 파생된 선종양(禅宗様) 양식을 더해, 「신한양」(宸翰様, しんかんよう)이라 불리는 서예풍을 확립하였고(신한宸翰은 어필을 가리킨다) 새로운 기풍을 당시 일본 서도계에 가져왔다.[232][233] 서예사 연구자 자이쓰 나가쓰기(財津永次)에 따르면 고다이고 천황은 북송(北宋)의 문인으로 「송사대가」(宋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정견(黄庭堅)의 서풍을 임제선(臨済禅)의 고승 슈호 묘초(宗峰妙超, 대등국사大燈国師)를 통해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233] 자이쓰는 고다이고 천황의 서예 작품을 「패기가 넘치는 것으로 이름 높다」(覇気横溢した書として名高い)고 평하였다.[233] 또한 고필(古筆) 연구가 고마쓰 시게미(小松茂美)는 고다이고 천황을 일본 역사상 가장 이름 높았던 명필 군주로써 후시미 천황(伏見天皇)에도 버금간다고 평하였고, 「힘이 넘치고 패기가 흐르는 글씨」(力に満ちた覇気あふれる書)를 남겼다고 평가한다.[234]

고다이고 천황의 글씨 작품은 1951년부터 1955년에 걸쳐 『後醍醐天皇宸翰天長印信(蠟牋)』[235][236]、『後醍醐天皇宸翰御置文〈/元弘三年八月廿四日〉』[237]、『四天王寺縁起〈後醍醐天皇宸翰本〉』[238]、『三朝宸翰』 (後醍醐天皇의 宸翰 소식 10통을 포함)[239] 이렇게 네 건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고다이고 천황에 그치지 않고 남북조 모두 천황들이 다투어 글씨를 연찬하였기에 이 시기 여러 군주들의 어필은 사료로써 뿐만 아니라 서예 예술 작품으로써도 중요하다.[232][233] 그런 한편으로 가쿠이 히로시(角井博)에 따르면 신한양은 서풍 그 자체의 예술적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평가가 높지만 화양(和様) 즉 일본 양식의 서도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보아 후세의 서도에 준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232]

11. 7. 기타

『태평기』 유포본 권1「관소 정지」(関所停止の事)에서는 즉위 직후, 겐코의 난 이전의 일화로 고다이고 천황이 백성의 진정에 귀를 기울이며 소송 문제 해결에 힘썼다는 묘사가 있다.[171][172]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이를 뒷받침할 사료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 막부 타도 활동을 위한 책모에만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는 소송 제도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되었다.[173]

2007년, 구노 노부요시에 의해 『각영소송상락일기』(覚英訴訟上洛日記)가 소개되면서 고다이고 천황이 재판에 임석했던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173] 기록소 개정은 오전 10시경이었고, 하루 몇 건의 구두 변론에 고다이고 천황이 임석하여 그날 내로 판결문을 발행했으며, 모든 공무를 끝내는 날이 저물 무렵이었다고 한다.[173] 고다이고 천황은 소송 제도 개혁에 있어서도 아버지 고우다인(後宇多院) 등 다이카쿠지 왕통이 행해왔던 소송 제도 개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어[174] 실행력, 지식,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73][174]

가마쿠라 시대 후기, 덕정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악한 정치는 천변지이로 이어진다는 천인상관설이 퍼져 통치자들은 선정에 힘썼다. 덕정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소송 제도 개혁이었고, 조의(고대의 궁정 의례)를 부흥시키는 것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고다이고 천황은 엔기・덴랴쿠의 치(10세기다이고무라카미 두 황제의 치세)를 부흥시켜야 할 덕정, 조의의 이상으로 삼았다. 조의 부흥자로서 고다이고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사람들에게 “성대”로 추앙받았고, 남북조 시대에는 북조의 준삼궁니조 요스케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유직고실에 정통하여, 스스로 『건무연중행사』를 저술하여 궁정의 권위 고양을 도모했다. 이 책은 사카이 노부히코는 건무 신정 하에서의 의례 집행에 대한 안내서로서 실천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40] 『건무연중행사』는 궁중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고후카쿠 천황(재위 1428년 - 1464년)은 이것을 필사하여 주석을 달고, 고도고몬 천황(재위 1464년 - 1500년)에게 권했다. 고스이미 천황(재위 1611년 - 1629년)도, 이 책을 준토쿠 천황의 『금비초』와 나란히 보물로 여겼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하에서 대내리 조영을 계획했지만, 카이 겐요는 이것이 단순한 권력 과시가 아니라, 「성대의 정무의 장」을 부흥시킴으로써 덕정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내리 조영 계획은 중과세로 이어졌다. 공경・진수부대장군의 키타바타케 아키에(키타바타케 친부의 장남)은 『키타바타케 아키에 상소문』(엔겐 3년/력응 원년(1338년))에서 중과세를 간했다. 가메다 토시카즈는 조영 계획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겐코의 난에 의한 피폐가 회복되지 않은 시기에 했던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 후기에 윤지(천황의 사적인 명령문) 대신, 태정관(율령제의 최고 기관)의 공식적인 공문서인 태정관부를 많이 발급했다. 카이는 태정관부 발급은 조의 부흥의 일환이며, 공가 덕정을 지향하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 구상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인으로서 고다이고 천황의 업적에는 紫式部의 소설 『源氏物語』(11세기 초) 연구가 있다. 고다이고 천황은 『정가본 원씨이야기』(定家本源氏物語)와 가와치방(河内方)의 주석서 『수원초(水原抄)』를 탐독하여, 여백에 자신의 견해를 적어 넣었다. 시토우지 요시나리(四辻善成)의 『카와이초(河海抄)』(1360년대) 서문에 따르면, 고다이고 천황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원씨이야기 강연회를 열어 자신의 견해를 펼쳤고, 타마바 다다모리(丹波忠守)(요시나리의 스승)와 마음이 통하여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라중최비초(原中最秘抄)』(1364년)에 따르면, 겐무 신정(建武の新政) 초기, 기우(行阿)에게 명하여 『가와치본 원씨이야기』(河内本源氏物語)를 헌상하게 하거나, 원씨이야기 등장인물의 계보를 직접 작성하는 등, 가장 바쁜 시기에도 『원씨이야기』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다이고 천황의 연구 성과는 적손인 쵸케이 천황(長慶天皇)에게 직접 계승되었고, 쵸케이는 『원씨이야기』 주석서 『센겐초(仙源抄)』를 저술하였다.

카토 요우스케(加藤洋介)는 「『원씨이야기』 엔기 덴랴쿠 준거설」은 시토우지 요시나리의 독창이 아니라,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생각해낸 것이 아닌가 한다. 고다이고 천황이 고안한 「『원씨이야기』 엔기 덴랴쿠 준거설」은 공통의 스승인 타마바 다다모리를 매개로 하여, 시토우지 요시나리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모리 시게아키(森茂暁)도 "수긍되는 의견이다"라고 동의하고 있다.

중세에는 차의 향과 맛으로 산지를 맞히는 놀이인 투차(다도의 전신)가 유행했는데, 고다이고 천황은 가장 먼저 시작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63] 실제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무례강에서 열린 음차회(『화원원신기』겐표 4년 11월 1일 (1324년 11월 18일) 조)도 투차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63]

고다이고 천황이 시작한 겐무 정권(1333–1336년) 하에서는 투차가 귀족 사회 밖으로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무사들 사이에서도 퍼져, 무로마치 막부의 『겐무식목』(엔겐 원년/겐무 3년 11월 7일 (1336년 12월 10일))에서는 차 모임에서 도박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태평기』(1370년경 완성)에서도, 바사라 다이묘들이 화려한 실례로 방을 장식하고, 많은 상품을 쌓아놓고 투차를 했다는 이야기가 그려진다.[63]

고다이고 천황은 차기의 한 종류로, 금륜사(きんりんじ/こんりんじ) 다입이라는 말차기(말차를 담는 용기)를 대표하는 형식을 고안했다.[64] 전국 시대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는 고다이고 천황이 만든 금륜사의 본가(원품)라는 전설적인 차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덴쇼 7년(1579년) 5월 27일에 안토 종론에서 승리한 정토종 고승 정안에게 하사했다.[65]

중국에서는 북송(北宋)(960~1127년) 무렵부터 산수의 경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돌을 즐기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는 현대 일본어로는 수석(水石)이라 한다. 이러한 취미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서 남북조 시대 무렵에 임제종(臨済宗)의 호관사련(虎関師錬)을 비롯한 선승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되었다.[66] 고다이고 천황 또한 애석가로서 "꿈의 부교(夢の浮橋)"라는 명석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거쳐 현재는 도쿠가와 미술관(徳川美術館)이 소장하고 있다.[66][67] 이름 그대로 다리 모양의 돌이며, 돌 바닥에는 주칠(朱漆)로 "꿈의 부교"라는 명문이 적혀 있는데, 필적 감정 결과 고다이고 천황의 자필임이 밝혀졌다.[67] 그 명문은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마지막 권의 "꿈의 부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67] 도쿠가와 미술관은 이 돌을 "분석(盆石)의 왕자"라고 평가하고 있다.[67]

전승에 따르면, "꿈의 부교"는 중국 장쑤성(江蘇省) 장닝산(江寧山)에서 온 영석(靈石)이며, 고다이고 천황은 겐코의 난(元弘の乱) 때 교토를 떠날 때에도 "꿈의 부교"를 품에 안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7]

고다이고 천황이 재능을 발견한 석립승(石立僧, 자연석을 이용한 작정에 능한 불교 승려)으로는 임제종(臨済宗)의 무소소석(夢窓疎石)이 있다. 무소소석은 세속에서의 출세를 싫어하고 여러 곳을 전전하며 은거하는 선승이었으나, 정중 2년(1325년) 봄, 고다이고 천황은 무소소석을 교토(京都) 남선사(南禅寺)로 초청하려 했고, 한 번은 거절당했으나, 다시 섭정(執権)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를 통해 상경을 청했기 때문에, 무소소석은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8월 29일에 상경하여 남선사에 들어갔다.[68] 이후 무소소석은 섭정 다카토키의 귀의를 받게 되었다.[68] 겐코의 난 이후, 겐무 원년(1334년) 9월에 고다이고 천황은 정식으로 무소소석에게 사사(師事)하고, 겐무 2년(1335년) 10월에 "무소국사(夢窓国師)"라는 국사호(国師号)를 수여했다.[68] 고다이고 천황이 승하하자, 무소소석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아시카가 다카요시(足利直義) 형제에게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도록 권유했고, 이 때문에 아시카가 형제는 무소소석을 개산(開山)으로 하여 텐류사(天龍寺)를 창건했다.[69] 무소소석은 다카요시와 협의하여 텐류사선(天龍寺船)을 원(元)에 파견하여 무역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사찰 건축 비용을 충당하고, 직접 젠정(禅庭)을 설계했다.[69] 1994년, 무소소석의 텐류사 정원은 "고도 교토의 문화재(古都京都の文化財)(교토시, 우지시, 오쓰시)"의 일부로서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유산(世界遺産)으로 등재되었다.[69]

12. 평가와 논쟁

## 긍정적 평가

가와치국(河内国)의 토호 출신으로 겐코의 난(元弘の乱)에서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많은 은상을 받았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평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248] 그러나 매송론(梅松論)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로 쫓겨갔을 때, 마사시게가 "임금께서 가마쿠라 막부를 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카우지 경의 충성스러운 공로 덕분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248] 이는 천하의 대세가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신뢰를 잃고 다카우지에게로 옮겨갔음을 마사시게가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48] 또한 세이겐인본(西源院本) 태평기에 따르면, 다카우지가 다시 동쪽으로 진군해 올 때,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과 구교들에게 "교토 안에서 다카우지를 맞아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싸우다 죽으라는 칙명을 내려 달라"며 비통해했다.[248] 매송론(梅松論)에서는 마사시게가 효고로 가는 도중 아마자키(尼崎)에서 "아시카가 군세와 싸우기 위해 이즈미와 가와치의 슈고로서 칙명을 받아 군사를 일으켰지만, 친족들조차 난색을 표하니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다. 천하가 임금께 등을 돌렸다는 것은 명백하다. 마사시게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라는 뜻을 고다이고 천황에게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248] 다카우지와의 전쟁 승패가 인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마사시게는, 백성이 천황과 겐무 정권에 등을 돌리고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판단했다.[248]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긍정했다.[249] 고다이고 천황 붕어 백일째 되는 날, 다카우지가 쓴 「고다이고인(後醍醐院) 백일제 원문」(後醍醐院百ヶ日御願文)[250]은 이를 잘 보여주는 문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예로부터 큰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덕이 없다고 합니다. 『후한서(後漢書) 「양진전」(楊震伝)의 주(注)에도 이르듯이 참새 같은 작은 새들도 보석 띠고리를 물고 와 인애에 감사하고 또 말없이 은혜를 갚으니, 어찌 우리 모든 민초들이 폐하의 황금 같은 군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 결코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고다이고인까지는 때에 맞추어 운을 일으키시어 성왕(聖王)이 되시어 '출진향리'(出震向離)의 길상을 갖고 계셨으며, 그 공은 신과 같고 덕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대대로 선제의 남기신 덕을 모아 군림하기를 태양과 같이 하시고, 우리가 우러러보기를 구름 같이 하는 왕자(王者)가 되셨습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옛 성왕들의 흥망성업을 계승하시고 진무 천황 이래 90여 대의 아득한 족보를 계승하시어, 겐오 이후 18년의 재위를 유지하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밖으로는 왕도의 대화(大化)를 이루셨는데, 지금 정치의 도의 본원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불법의 융성을 도모하셨는데, 그 성자의 마음을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신이 내리신 서예의 재능을 지니셔서 '서성' 왕희지에도 근접하였다는 당 태종도 뛰어넘는 분이셨습니다. 폐하의 화사한 생황의 울림만 있으면 이제 와서 한 고조의 전설의 피리를 구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폐하의 와카(和歌)의 재주는 마치 노래의 신 스사노오노 미코토(素盞鳴尊) 같으시어 우리나라 고래의 가풍(歌風)을 연상케 했습니다. 폐하가 비파의 신기 '겐조'(玄象)를 들어 연주하신 비곡의 가락은 그를 처음으로 손에 잡으셨던 '성왕(聖王)' 무라카미 황제(村上帝)의 연주와도 같습니다. 구해야 할 도를 다 구하고 닦아야 할 덕을 다 닦은, 그것이 고다이고인이라는 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얼마 동안 수도의 찬란한 궁궐을 하직하고 멀리 요시노에 있는 수도로 행차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용마가 돌아오지 않고 성스러운 백운이 솟아오르는 준엄한 모습과 같았습니다. 천자의 가마는 오랫동안 바깥에 머물러서, 마침내 여행 속에서 붕어하셨습니다. 성스러운 천자와 같은 죽음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여러 황제와 같이 붕어하시니, 아아, 얼마나 애처로운 일입니까.

이에 폐하의 제자인 저는 황공하게도 아상(亜相, 대납언)으로 출사하여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무직(武職)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운수의 돌고 도는 것은 한(漢)이라는 나라가 누렸던 역사와 같은 행운을 떠올리게 합니다. 활과 화살을 주머니에 넣고(무기를 차고) 그저 편안한 평화를 빌며, 국가를 보호함으로써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섬김으로써 인의를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전공밖에 얻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오직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행운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저 같은 약배가, 이렇게까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실히, 선제 폐하께서 거대한 성조인 홍곡과 같이 힘차게 날개짓하신 것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폐하의 따뜻하고 다정하신 말씀이 아직도 제 귓전에 맴돌고 있습니다. 폐하를 사모하고 공경한 나머지 가슴이 괴로워지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받은 은혜는 무궁무진하며 보답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일곱 번의 칠일공양을 꾸준히 올린 뒤 추복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시간의 변화를 아쉬워하며 사경도 하였습니다. 지난날 승력보살(勝力菩薩) 도홍경(陶弘景)이 입적하고 백일 후에 남겨진 제자들이 흠모하였고, 당 태종이 승하하고 백일 후에 관리들이 선제의 남은 정취를 좇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정도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즉 이제 도회태장계만다라(図絵胎蔵界曼荼羅) 한 부 ・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荼羅) 한 부, 도회관세음보살(図絵観世音菩薩) 한 부 ・ 습사대일경(摺写大日経) 3권 ・ 이취경(理趣経) 4권 ・ 수구다라니경(随求陀羅尼経) 3권을 바치고, 묘법연화경 10부를 전독하게 하고, 나아가 다섯 개의 선실을 더하여 열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행하게 하며, 비인구제도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도지인(等持院)에 기부도 하고 밀교의 의식 자리도 만들어 전 대승정 법인 대화상 주관으로 독경을 하게 했습니다. 수많은 도인·승려·구교(公卿)·덴조비토(殿上人)들이 모여 폐하의 보리를 추모하였습니다. 모든 경색이 장엄하니 폐하의 위덕에 합당한 것입니다.

폐하의 성령은 이 천오백추지신주(千五百秋之神州)인 일본으로부터 나와, 신속하게 아미타여래의 보좌로 향하실 것입니다. 삼십육천의 선실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상적광토(常寂光土), 영원한 깨달음을 얻은 진리의 절대계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이 부족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팔정도(八正道)로, 즉 열반하기 위한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자(弟子)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정2위(正二位)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미나모토노 아손 타카우지(源朝臣尊氏) 삼가 아룁니다(敬白).|아시카가 타카우지, 「고다이고인 백일제 원문」(後醍醐院百ヶ日御願文)}}

가메다 도시카즈(亀田俊和)는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겐무 정권의 여러 정책들이 현실적으로 뛰어났고, 다카우지의 무로마치 막부도 대부분 이를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251] 예를 들어, 고다이고 천황은 토지 급부 명령 문서에 추가 문서(잡소결단소시행첩)를 발급하여 오류를 검사하고 강제집행권을 도입하여, 약소 무사나 사찰도 안전하게 토지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251] 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執事) 고 모로나오(高師直)를 통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도 이어져 막부 기본법의 하나가 되었다.[251] 가메다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야말로 고다이고 천황에게 있어서 최대의 충신이었다"고 평했다.[249]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지엔과 함께 일본 중세의 역사가로써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이며,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써「노치노 산보」(後の三房)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붕어한 뒤에는 남조를 주도하였고 남조 준삼후(准三宮)로써 황후 등에 버금가는 자리에까지 올랐던 구교이다. 지카후사는 주요 저작인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붕어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늙은 몸에서 넘쳐나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어, 붓놀림조차 멈춰버렸다"라고, 친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전사한 대목보다 더욱 강조하며 자신의 슬픔을 적었다.[254]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통합 평가로써는 고다이고 천황을 가장 뛰어난 천황의 한 명으로 평가하였다.[255]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진언밀교뿐만 아니라 선종 등 다른 종파에도 두터운 보호를 행하였고, 중국에서 온 선승들에게도 입궐 및 알현을 허락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255] 특히 고다이고 천황의 학문적 능력을 칭찬하며, 일본과 중국 학문에 통달한 면에서 중고(中比) 이래로 고다이고에 필적할 천황은 없다고까지 하였다.[255] 또한 고우다 천황이 치천의 군(治天の君)을 사임하고 고다이고가 처음으로 친정(親政)을 개시했을 때 뛰어난 소송 처리를 하여 백성들이 고다이고를 공경하였다고 주장한다.[255]

그러나 지카후사는 정치 사상상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특히 『신황정통기』에서 겐무 정권의 인사정책에 대해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형제와 무사 전체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가 과했으며, 황족과 귀족의 소유 영지까지도 무사의 은상으로 빠져나가버렸다고 비판한다.[256] 또한 오슈 합전(奥州合戦) 이후 은상으로 관위를 주는 관례가 끊어졌는데,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부활시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 ・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 무사시노카미(武蔵守) ・ 산기(参議)로 서위한 것을 시작으로 무사들에게 관위를 나누어 주었다.[257][258] 이에 대해 지카후사는 "공가의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보다 더한 무사의 세상이 된 것 같다"고 맹렬하게 항의하였다.[258]

하지만 현실주의자였던 지카후사는[259] 정치사상상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하면서도, 정치 실무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적극 활용했다. 남조의 지방 지휘관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인수받아 예하 무사에게 관위를 수여하는 독자적인 재량을 부여받았다.[260] 그중에서도 은상으로 벼슬을 나눠준 것이 바로 이 정책을 비판한 지카후사 자신이었고, 도고쿠 무사들에게 관위 추천서를 남발했다.[261] 군사적, 영토적으로 열세였던 남조에게 '은상으로써의 관위' 정책은 토지가 없어도 무사들로부터 구심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은상 시스템이라고 지카후사는 이해했던 것이다.[261] 간노의 소란으로 보수파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멸망하고 나서야 무로마치 막부가 은상으로써의 관위 수여를 도입한 것은, 남조보다 꽤 늦은 시기였다. 야마다 타카시(山田貴司)는 남조가 실제로 이 시책으로 성공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할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121]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상주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北畠顕家上奏文)에서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비판을 남겼다. 7개 조만 남아 있는 그 내용은 분명하지 않으나,[263] 남아 있는 내용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에 대한 실질적인 부정이다.[264] 현존하는 7개 조는 「수도 집중 억제 및 지방 분권 추진」「조세 감면 및 사치 금지」「은상으로 관위 주는 정책 중지」「구교(公卿) ・ 덴조비토(殿上人) ・ 승려에 대한 은혜는 직무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교토 탈환 후 행차·주연 삼가」「법령 개혁 빈도 감소」「아첨하는 신하 배제」 등이다.[265] 특히 제1조는 고다이고 천황의 전국 지배 통치기구에 대한 언급으로 중요하며,[265] 나머지 6조 중 절반이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에 집중된 것도 특징이다.[266][267]

일본 사학자 사토 신이치(佐藤進一)는 아키이에의 겐무 정권 비판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266] 그러나 가메다 도시카즈는 사치를 경계하는 조항 외에는 반드시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아니었거나, 장기적으로는 효과를 가져오는 시책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남조 법 제도의 기초가 되었음을 지적하며 아키이에 및 사토 신이치의 건무정권 비판에 반박하였다.[268]

고다이고 천황 편에 섰던 공가들은 마데노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나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등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을 제외하고는 대개 겐무 정권에 비판적이었다. 겐무 3년(1336년) 2월 29일, 도인 긴카타(洞院公賢)를 위시한 구교층은 「엔겐」으로 연호를 고칠 것을 주장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 변경에 소극적이었으나, 구교들은 "고다이고가 세운 『겐무』 연호를 내리는 것도 신정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라며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같은 해 정월,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인 마데노코지 노부후사와 지구사 다다아키가 출가한 것도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이후 '신정'에 손을 대지 않고, '신정'에 비판적이었던 지카후사, 노부후사, 다다아키 등에게 대행시켜 구교층의 비판을 억누르려 하였다.

『매송론』에서는 "기록소와 결단소를 두었지만 측근 신하들이 몰래 소를 넣어 판결을 왜곡하고, 천황의 결정을 보이는 윤지가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바뀌는 상황이라 여러 사람들의 부침이 손바닥 뒤집듯 하였다", "무사들은 겐무 정권이 보탬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무가가 공가에 원한을 품고 공가와 무가가 물과 불 같은 사이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평기』에서는 겐무 정권이 "정도(政道)가 바르지 못하였다"(政道正しからず)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는 무가나 공가 뿐 아니라 도시 주민들과 지방 주민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도시 주민들의 비판으로는 교토 니조 강변에 내걸린 '니조 강변의 낙서'가 유명하다. 이 낙서는 "御代に生てさまさまの、事をみきくそ不思議共、京童の口すさみ、十分一そもらすなり"라는 말로 끝맺으며, 당시 교토 서민들의 공통 인식이었다.

지방 주민들의 비판으로는 겐무 원년(1334년) 여름 와카사 국(若狭国)의 太良荘 농민이 올린 문서가 유명하다. 이는 장원 영주의 당시에 대한 연공이 무거워졌다는 것을 호소하는데, 이는 고다이고 천황이 대내리를 짓는 등의 공사를 위해 여러 구니에 수입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매겼던 것과 관계가 있으며, 지방 주민들에게도 겐무 정권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렌카(連歌)를 완성한 일본 중세 최대의 문인이자 북조에서 셋쇼(摂政) ・ 간파쿠(関白) ・ 태정대신(太政大臣)을 역임하고 준삼후(准三宮)로써 황후에도 준하는 지위까지 올랐던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는 적대 파벌이었지만 고다이고 천황을 존경했다.[269] 이는 『겐무 연중행사(建武年中行事)를 지은 유직고실(有職故実) 연구의 대가이자 조의(朝儀) 부흥자로서의 고다이고 천황을 평가한 것이라고 한다.[269]

북조에서 대납언까지 지냈던 나카노인 미치후유(中院通冬)는 고다이고 천황 붕어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며 반신반의했다.(『中院一品記』 엔겐 4년 8월 19일조)[270][254] 이후 무로마치 막부 ・ 북조로부터 공식 조보가 전해지자, "천하의 중대사이자 할 말을 잃은 사건이다. 이후 구게가 쇠미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정말로 슬프다. 모든 일의 재흥은 모두 그분의 어대(고다이고 천황의 재위기)에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이 발탁한) 현명한 인재들은 과거보다 훨씬 높고 빼어난 이들이었다. 그 어찌 한탄하지 않는 자가 있으랴"라고 평했다.(『中院一品記』 엔겐 4년 8월 28일조)[270][254]

역사 모노가타리 『마스카가미』(14세기 중반)의 저자도 북조의 유력 정신(廷臣)이었음에도 고다이고 천황을 찬미하였다.[271][272] 그 정체는 니조 요시모토라는 설이 유력하며,[271] 와다 히데마쓰(和田英松)가 주장한 니조 다메아키라(二条為明) 설,[273] 다나카 다카히로(田中隆裕)가 주장한 도인 기미카타(洞院公賢) 설[272]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한편 북조에서 내대신(内大臣)을 지낸 산조 긴카타(三条公忠)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비판적이었으며, "고다이고인(後醍醐院)의 행하신 행동은 이 한 가지 건(집안의 격이 낮은 요시다 사다후사를 내대신으로 삼은 것) 뿐 아니라 매사가 상궤를 벗어났다. 어찌 후세가 선례로서 따를 것인가"라고 평하였다.(『後愚昧記』 오안 3년(1370년) 3월 16일조)[274]

패전 후 겐무 정권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겐무 정권에 대한 역사관은 『태평기』・사토 신이치・아미노 요시히코 설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었다. 모리 시게아키는 저서 『고다이고 천황 남북조 동란을 장식한 패왕』(2000년)에서 『태평기』 사관과는 다른, 겐무 정권에 대해 세 가지 관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

첫째, 겐무 정권 발족으로 일본의 중심이 교토로 명시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동생 다다요시의 강력한 주장을 듣지 않고 고다이고 천황과 공가 정권의 중추였던 교토를 새로운 막부의 거점으로 정했다. 이 문화, 정치, 경제, 유통의 중심에 아시카가 쇼군 가문이 자리잡음으로써 단순한 무가 정권이 아니라 일본 전국을 통치하는 기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둘째, 일본 전국 지배를 시야에 넣은 법무 기관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에 1번 1구제(一番一区制)를 도입했다(2번은 도카이도 담당 등). 이는 고다이고 천황 이전 통치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발상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일본 전국 지배 기구가 이후 일본 전국 정권 통치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셋째,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한정적인 역할밖에 갖지 않았던 슈고(守護)를 그 힘을 정확히 인식하고 슈고 ・ 고쿠시를 '병치'한다는 제도를 채용하여 권한을 늘리고, 무로마치 막부의 슈고 제도로 이어지는 단초를 만들었다.

모리 시게아키는 고다이고 천황을 뛰어난 혁명가이자 시대를 앞서 간 천재라고 평가했다. 즉, 가마쿠라 막부 → 겐무 신정 → 무로마치 막부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지만, 고다이고 천황이 정체되어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에 대한 '돌파구' 역할을 하고 차기 무로마치적 세계(室町的世界)가 성립하는 요소가 된 것을 평가했다. 또한 그의 정치 구상도 악한 것은 아니었고, 60년 정도 후에나마 그 많은 부분이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무렵에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 덕정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악한 정치는 천변지이로 이어진다는 천인상관설이 퍼져, 통치자들은 선정에 힘쓰고 천재를 막으려 했다. 덕정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소송 제도 개혁이었지만, 조의(고대의 궁정 의례)를 부흥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고다이고 천황은 엔기・덴랴쿠의 치(10세기다이고무라카미 두 황제의 치세)를 부흥시켜야 할 덕정・조의의 이상으로 삼았다. 조의 부흥자로서 고다이고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사람들에게 “성대”로 추앙받았고(『고후시미 천황사서』), 남북조 시대에는 북조의 준삼궁니조 요스케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특히 조의 연구 면에서 유직고실에 정통하여, 스스로 『겐무 연중행사』라는 책을 저술하여 궁정의 권위 고양을 도모했다. 이 책은 행사의 기원 등의 일화는 생략되고, 언제 어떻게 실행하는가 하는 순서가 적힌 실천서가 되어 있으며, 사카이 노부히코는 건무 신정 하에서의 의례 집행에 대한 안내서로서 실천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40]。「미래의 선례가 되어야 한다」는 신정의 의기와 대조적으로, 이 책의 서문에서는「후세의 거울(모범)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더라도, 혹시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후세 사람들에게〕어떤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겐무연중행사』는 궁중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고후카쿠 천황(재위 1428년 - 1464년)은 이것을 필사하여 주석을 달고, 폐지되었던 행사를 이 책에 따라 부흥시키도록 아들인 고도고몬 천황(재위 1464년 - 1500년)에게 권했다. 나중에 자신도 『고스이미인 연중행사』를 저술한 고스이미 천황(재위 1611년 - 1629년)도, 이 책을 준토쿠 천황의 『금비초』와 나란히 보물로 여기고, 후세까지 남는 거울이라고 칭찬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하에서 대내리 조영을 계획했지만, 카이 겐요는 이것이 단순한 권력 과시가 아니라, '성대의 정무의 장'을 부흥시킴으로써 덕정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내리 조영 계획은 중과세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경・진수부대장군 키타바타케 아키에(키타바타케 친부의 장남)는 『키타바타케 아키에 상소문』(엔겐 3년/력응 원년(1338년))에서 중과세를 간했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대내리 조영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가메다 토시카즈는 조영 계획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겐코의 난에 의한 피폐가 회복되지 않은 시기에 했던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 후기에는 윤지(천황의 사적인 명령문) 대신 태정관(율령제의 최고 기관)의 공식적인 공문서인 태정관부를 많이 발급했다. 카이는 태정관부 발급은 조의 부흥의 일환이며, 공가 덕정을 지향하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 구상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 부정적 평가

가와치국(河内国)의 토호(土豪) 출신으로, 겐코의 난(元弘の乱)에서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많은 은상을 받았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평가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매송론(梅松論)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로 쫓겨 갔을 때, "천황께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카우지 공의 충성 덕분이다"라고 발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천하의 대세가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신뢰를 잃고 다카우지에게로 옮겨갔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48] 또한 태평기 서원원본(西源院本)에 따르면, 다카우지가 다시 동쪽으로 진군해 올 때, 고다이고 천황이나 공경들에게 "교토 안에서 다카우지를 맞아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싸우다 죽으라는 칙명을 내려 주십시오"라며 비통해했다는 마사시게의 말과 불만을 전하고 있다.[248] 마사시게는 효고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마자키(尼崎)에서 "아시카가 군세를 맞아 싸우기 위해 이 마사시게가 이즈미나 가와치의 슈고로서 칙명에 따라 군세를 일으키는데도 친한 족류와 일족들마저 난색을 표하거늘, 일반 고쿠진(国人) ・ 토민(土民)은 말할 것도 없다. 천하가 임금께 등을 돌렸다는 것은 명확하다. 마사시게의 목숨은 무익한 것으로 격전하다 죽을 것이다"라는 취지를 고다이고 천황에게 아뢰었다는 기록이 있다.[248] 다카우지와의 전쟁의 승패가 인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마사시게는, 세상 사람들이 천황이나 겐무 신정에 등을 돌리고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48]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는 간노(観応) 2년경에 자신이 이전 남조 측으로 돌아섰을 때 맺은 관계를 이용해 남조 측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남북조의 강화 교섭을 행했다. 이때 주고받았던 서간이 「요시노 어사 서안」(吉野御事書案)이다.[252] 여기서 다다요시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해 "고다이고 임금께서 아첨하는 신하들을 편애하셨던 것으로 인해 일이 대란에 이르렀습니다", "고묘 임금께서는 고다이고 임금으로부터 정식으로 삼종신기를 넘겨 받으셨고 무가 측은 양통질립의 원칙을 지켜 고묘 임금의 황태자로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을 세워 황위 계승에 대해 충분히 배려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임금께서는 독단으로 요시노에 잠행하셨으니 이를 가지고 무가 측이 천하를 찬탈하였다 비난함은 온당치 않습니다"라며 고다이고 천황의 행동을 비난한다.[253]

또한 화목 조건으로 공가 일통(公家一統)을 주장하는 지카후사에 대해 다다요시는 "겐무 신정의 실패를 생각하면 그것은 무리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습니다. 여러 구니(国)의 무사들이 그걸 바랄지 어떨지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하여, 당시 무사들, 그것도 쇼군 다카우지의 친동생으로 무가 세력의 제2인자이자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그 자신도 형 못지않은 많은 은상을 받았을 다다요시조차도 겐무 신정은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253]

北畠親房지엔과 함께 중세 역사가의 양대 산맥으로 여겨지는 뛰어난 학자이며,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

12. 1. 긍정적 평가

가와치국(河内国)의 토호 출신으로 겐코의 난(元弘の乱)에서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많은 은상을 받았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평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248] 그러나 매송론(梅松論)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로 쫓겨갔을 때, 마사시게가 "임금께서 가마쿠라 막부를 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카우지 경의 충성스러운 공로 덕분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248] 이는 천하의 대세가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신뢰를 잃고 다카우지에게로 옮겨갔음을 마사시게가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48] 또한 세이겐인본(西源院本) 태평기에 따르면, 다카우지가 다시 동쪽으로 진군해 올 때,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과 구교들에게 "교토 안에서 다카우지를 맞아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싸우다 죽으라는 칙명을 내려 달라"며 비통해했다.[248] 매송론(梅松論)에서는 마사시게가 효고로 가는 도중 아마자키(尼崎)에서 "아시카가 군세와 싸우기 위해 이즈미와 가와치의 슈고로서 칙명을 받아 군사를 일으켰지만, 친족들조차 난색을 표하니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다. 천하가 임금께 등을 돌렸다는 것은 명백하다. 마사시게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라는 뜻을 고다이고 천황에게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248] 다카우지와의 전쟁 승패가 인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마사시게는, 백성이 천황과 겐무 정권에 등을 돌리고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판단했다.[248]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긍정했다.[249] 고다이고 천황 붕어 백일째 되는 날, 다카우지가 쓴 「고다이고인(後醍醐院) 백일제 원문」(後醍醐院百ヶ日御願文)[250]은 이를 잘 보여주는 문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예로부터 큰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덕이 없다고 합니다. 『후한서(後漢書) 「양진전」(楊震伝)의 주(注)에도 이르듯이 참새 같은 작은 새들도 보석 띠고리를 물고 와 인애에 감사하고 또 말없이 은혜를 갚으니, 어찌 우리 모든 민초들이 폐하의 황금 같은 군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 결코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고다이고인까지는 때에 맞추어 운을 일으키시어 성왕(聖王)이 되시어 '출진향리'(出震向離)의 길상을 갖고 계셨으며, 그 공은 신과 같고 덕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대대로 선제의 남기신 덕을 모아 군림하기를 태양과 같이 하시고, 우리가 우러러보기를 구름 같이 하는 왕자(王者)가 되셨습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옛 성왕들의 흥망성업을 계승하시고 진무 천황 이래 90여 대의 아득한 족보를 계승하시어, 겐오 이후 18년의 재위를 유지하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밖으로는 왕도의 대화(大化)를 이루셨는데, 지금 정치의 도의 본원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불법의 융성을 도모하셨는데, 그 성자의 마음을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신이 내리신 서예의 재능을 지니셔서 '서성' 왕희지에도 근접하였다는 당 태종도 뛰어넘는 분이셨습니다. 폐하의 화사한 생황의 울림만 있으면 이제 와서 한 고조의 전설의 피리를 구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폐하의 와카(和歌)의 재주는 마치 노래의 신 스사노오노 미코토(素盞鳴尊) 같으시어 우리나라 고래의 가풍(歌風)을 연상케 했습니다. 폐하가 비파의 신기 '겐조'(玄象)를 들어 연주하신 비곡의 가락은 그를 처음으로 손에 잡으셨던 '성왕(聖王)' 무라카미 황제(村上帝)의 연주와도 같습니다. 구해야 할 도를 다 구하고 닦아야 할 덕을 다 닦은, 그것이 고다이고인이라는 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얼마 동안 수도의 찬란한 궁궐을 하직하고 멀리 요시노에 있는 수도로 행차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용마가 돌아오지 않고 성스러운 백운이 솟아오르는 준엄한 모습과 같았습니다. 천자의 가마는 오랫동안 바깥에 머물러서, 마침내 여행 속에서 붕어하셨습니다. 성스러운 천자와 같은 죽음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여러 황제와 같이 붕어하시니, 아아, 얼마나 애처로운 일입니까.

이에 폐하의 제자인 저는 황공하게도 아상(亜相, 대납언)으로 출사하여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무직(武職)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운수의 돌고 도는 것은 한(漢)이라는 나라가 누렸던 역사와 같은 행운을 떠올리게 합니다. 활과 화살을 주머니에 넣고(무기를 차고) 그저 편안한 평화를 빌며, 국가를 보호함으로써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섬김으로써 인의를 다하고자 합니다.

저는 전공밖에 얻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오직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행운인 번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저 같은 약배가, 이렇게까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실히, 선제 폐하께서 거대한 성조인 홍곡과 같이 힘차게 날개짓하신 것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폐하의 따뜻하고 다정하신 말씀이 아직도 제 귓전에 맴돌고 있습니다. 폐하를 사모하고 공경한 나머지 가슴이 괴로워지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받은 은혜는 무궁무진하며 보답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일곱 번의 칠일공양을 꾸준히 올린 뒤 추복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시간의 변화를 아쉬워하며 사경도 하였습니다. 지난날 승력보살(勝力菩薩) 도홍경(陶弘景)이 입적하고 백일 후에 남겨진 제자들이 흠모하였고, 당 태종이 승하하고 백일 후에 관리들이 선제의 남은 정취를 좇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정도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즉 이제 도회태장계만다라(図絵胎蔵界曼荼羅) 한 부 ・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荼羅) 한 부, 도회관세음보살(図絵観世音菩薩) 한 부 ・ 습사대일경(摺写大日経) 3권 ・ 이취경(理趣経) 4권 ・ 수구다라니경(随求陀羅尼経) 3권을 바치고, 묘법연화경 10부를 전독하게 하고, 나아가 다섯 개의 선실을 더하여 열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행하게 하며, 비인구제도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도지인(等持院)에 기부도 하고 밀교의 의식 자리도 만들어 전 대승정 법인 대화상 주관으로 독경을 하게 했습니다. 수많은 도인·승려·구교(公卿)·덴조비토(殿上人)들이 모여 폐하의 보리를 추모하였습니다. 모든 경색이 장엄하니 폐하의 위덕에 합당한 것입니다.

폐하의 성령은 이 천오백추지신주(千五百秋之神州)인 일본으로부터 나와, 신속하게 아미타여래의 보좌로 향하실 것입니다. 삼십육천의 선실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상적광토(常寂光土), 영원한 깨달음을 얻은 진리의 절대계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이 부족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팔정도(八正道)로, 즉 열반하기 위한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자(弟子)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 정2위(正二位)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미나모토노 아손 타카우지(源朝臣尊氏) 삼가 아룁니다(敬白).|아시카가 타카우지, 「고다이고인 백일제 원문」(後醍醐院百ヶ日御願文)}}

가메다 도시카즈(亀田俊和)는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겐무 정권의 여러 정책들이 현실적으로 뛰어났고, 다카우지의 무로마치 막부도 대부분 이를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251] 예를 들어, 고다이고 천황은 토지 급부 명령 문서에 추가 문서(잡소결단소시행첩)를 발급하여 오류를 검사하고 강제집행권을 도입하여, 약소 무사나 사찰도 안전하게 토지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251] 이는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執事) 고 모로나오(高師直)를 통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도 이어져 막부 기본법의 하나가 되었다.[251] 가메다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야말로 고다이고 천황에게 있어서 최대의 충신이었다"고 평했다.[249]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지엔과 함께 일본 중세의 역사가로써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이며,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으로써「노치노 산보」(後の三房)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붕어한 뒤에는 남조를 주도하였고 남조 준삼후(准三宮)로써 황후 등에 버금가는 자리에까지 올랐던 구교이다. 지카후사는 주요 저작인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붕어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늙은 몸에서 넘쳐나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어, 붓놀림조차 멈춰버렸다"라고, 친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전사한 대목보다 더욱 강조하며 자신의 슬픔을 적었다.[254]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통합 평가로써는 고다이고 천황을 가장 뛰어난 천황의 한 명으로 평가하였다.[255]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진언밀교뿐만 아니라 선종 등 다른 종파에도 두터운 보호를 행하였고, 중국에서 온 선승들에게도 입궐 및 알현을 허락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255] 특히 고다이고 천황의 학문적 능력을 칭찬하며, 일본과 중국 학문에 통달한 면에서 중고(中比) 이래로 고다이고에 필적할 천황은 없다고까지 하였다.[255] 또한 고우다 천황이 치천의 군(治天の君)을 사임하고 고다이고가 처음으로 친정(親政)을 개시했을 때 뛰어난 소송 처리를 하여 백성들이 고다이고를 공경하였다고 주장한다.[255]

그러나 지카후사는 정치 사상상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특히 『신황정통기』에서 겐무 정권의 인사정책에 대해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형제와 무사 전체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가 과했으며, 황족과 귀족의 소유 영지까지도 무사의 은상으로 빠져나가버렸다고 비판한다.[256] 또한 오슈 합전(奥州合戦) 이후 은상으로 관위를 주는 관례가 끊어졌는데,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부활시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 ・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 무사시노카미(武蔵守) ・ 산기(参議)로 서위한 것을 시작으로 무사들에게 관위를 나누어 주었다.[257][258] 이에 대해 지카후사는 "공가의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보다 더한 무사의 세상이 된 것 같다"고 맹렬하게 항의하였다.[258]

하지만 현실주의자였던 지카후사는[259] 정치사상상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하면서도, 정치 실무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적극 활용했다. 남조의 지방 지휘관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인수받아 예하 무사에게 관위를 수여하는 독자적인 재량을 부여받았다.[260] 그중에서도 은상으로 벼슬을 나눠준 것이 바로 이 정책을 비판한 지카후사 자신이었고, 도고쿠 무사들에게 관위 추천서를 남발했다.[261] 군사적, 영토적으로 열세였던 남조에게 '은상으로써의 관위' 정책은 토지가 없어도 무사들로부터 구심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은상 시스템이라고 지카후사는 이해했던 것이다.[261] 간노의 소란으로 보수파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멸망하고 나서야 무로마치 막부가 은상으로써의 관위 수여를 도입한 것은, 남조보다 꽤 늦은 시기였다. 야마다 타카시(山田貴司)는 남조가 실제로 이 시책으로 성공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할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121]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상주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北畠顕家上奏文)에서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비판을 남겼다. 7개 조만 남아 있는 그 내용은 분명하지 않으나,[263] 남아 있는 내용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에 대한 실질적인 부정이다.[264] 현존하는 7개 조는 「수도 집중 억제 및 지방 분권 추진」「조세 감면 및 사치 금지」「은상으로 관위 주는 정책 중지」「구교(公卿) ・ 덴조비토(殿上人) ・ 승려에 대한 은혜는 직무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교토 탈환 후 행차·주연 삼가」「법령 개혁 빈도 감소」「아첨하는 신하 배제」 등이다.[265] 특히 제1조는 고다이고 천황의 전국 지배 통치기구에 대한 언급으로 중요하며,[265] 나머지 6조 중 절반이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에 집중된 것도 특징이다.[266][267]

일본 사학자 사토 신이치(佐藤進一)는 아키이에의 겐무 정권 비판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266] 그러나 가메다 도시카즈는 사치를 경계하는 조항 외에는 반드시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아니었거나, 장기적으로는 효과를 가져오는 시책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남조 법 제도의 기초가 되었음을 지적하며 아키이에 및 사토 신이치의 건무정권 비판에 반박하였다.[268]

고다이고 천황 편에 섰던 공가들은 마데노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나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등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을 제외하고는 대개 겐무 정권에 비판적이었다. 겐무 3년(1336년) 2월 29일, 도인 긴카타(洞院公賢)를 위시한 구교층은 「엔겐」으로 연호를 고칠 것을 주장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 변경에 소극적이었으나, 구교들은 "고다이고가 세운 『겐무』 연호를 내리는 것도 신정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라며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같은 해 정월,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인 마데노코지 노부후사와 지구사 다다아키가 출가한 것도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이후 '신정'에 손을 대지 않고, '신정'에 비판적이었던 지카후사, 노부후사, 다다아키 등에게 대행시켜 구교층의 비판을 억누르려 하였다.

『매송론』에서는 "기록소와 결단소를 두었지만 측근 신하들이 몰래 소를 넣어 판결을 왜곡하고, 천황의 결정을 보이는 윤지가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바뀌는 상황이라 여러 사람들의 부침이 손바닥 뒤집듯 하였다", "무사들은 겐무 정권이 보탬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무가가 공가에 원한을 품고 공가와 무가가 물과 불 같은 사이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평기』에서는 겐무 정권이 "정도(政道)가 바르지 못하였다"(政道正しからず)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는 무가나 공가 뿐 아니라 도시 주민들과 지방 주민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도시 주민들의 비판으로는 교토 니조 강변에 내걸린 '니조 강변의 낙서'가 유명하다. 이 낙서는 "御代に生てさまさまの、事をみきくそ不思議共、京童の口すさみ、十分一そもらすなり"라는 말로 끝맺으며, 당시 교토 서민들의 공통 인식이었다.

지방 주민들의 비판으로는 겐무 원년(1334년) 여름 와카사 국(若狭国)의 太良荘 농민이 올린 문서가 유명하다. 이는 장원 영주의 당시에 대한 연공이 무거워졌다는 것을 호소하는데, 이는 고다이고 천황이 대내리를 짓는 등의 공사를 위해 여러 구니에 수입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매겼던 것과 관계가 있으며, 지방 주민들에게도 겐무 정권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렌카(連歌)를 완성한 일본 중세 최대의 문인이자 북조에서 셋쇼(摂政) ・ 간파쿠(関白) ・ 태정대신(太政大臣)을 역임하고 준삼후(准三宮)로써 황후에도 준하는 지위까지 올랐던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는 적대 파벌이었지만 고다이고 천황을 존경했다.[269] 이는 『겐무 연중행사(建武年中行事)를 지은 유직고실(有職故実) 연구의 대가이자 조의(朝儀) 부흥자로서의 고다이고 천황을 평가한 것이라고 한다.[269]

북조에서 대납언까지 지냈던 나카노인 미치후유(中院通冬)는 고다이고 천황 붕어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며 반신반의했다.(『中院一品記』 엔겐 4년 8월 19일조)[270][254] 이후 무로마치 막부 ・ 북조로부터 공식 조보가 전해지자, "천하의 중대사이자 할 말을 잃은 사건이다. 이후 구게가 쇠미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정말로 슬프다. 모든 일의 재흥은 모두 그분의 어대(고다이고 천황의 재위기)에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이 발탁한) 현명한 인재들은 과거보다 훨씬 높고 빼어난 이들이었다. 그 어찌 한탄하지 않는 자가 있으랴"라고 평했다.(『中院一品記』 엔겐 4년 8월 28일조)[270][254]

역사 모노가타리 『마스카가미』(14세기 중반)의 저자도 북조의 유력 정신(廷臣)이었음에도 고다이고 천황을 찬미하였다.[271][272] 그 정체는 니조 요시모토라는 설이 유력하며,[271] 와다 히데마쓰(和田英松)가 주장한 니조 다메아키라(二条為明) 설,[273] 다나카 다카히로(田中隆裕)가 주장한 도인 기미카타(洞院公賢) 설[272]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한편 북조에서 내대신(内大臣)을 지낸 산조 긴카타(三条公忠)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비판적이었으며, "고다이고인(後醍醐院)의 행하신 행동은 이 한 가지 건(집안의 격이 낮은 요시다 사다후사를 내대신으로 삼은 것) 뿐 아니라 매사가 상궤를 벗어났다. 어찌 후세가 선례로서 따를 것인가"라고 평하였다.(『後愚昧記』 오안 3년(1370년) 3월 16일조)[274]

패전 후 겐무 정권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겐무 정권에 대한 역사관은 『태평기』・사토 신이치・아미노 요시히코 설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었다. 모리 시게아키는 저서 『고다이고 천황 남북조 동란을 장식한 패왕』(2000년)에서 『태평기』 사관과는 다른, 겐무 정권에 대해 세 가지 관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

첫째, 겐무 정권 발족으로 일본의 중심이 교토로 명시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동생 다다요시의 강력한 주장을 듣지 않고 고다이고 천황과 공가 정권의 중추였던 교토를 새로운 막부의 거점으로 정했다. 이 문화, 정치, 경제, 유통의 중심에 아시카가 쇼군 가문이 자리잡음으로써 단순한 무가 정권이 아니라 일본 전국을 통치하는 기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둘째, 일본 전국 지배를 시야에 넣은 법무 기관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에 1번 1구제(一番一区制)를 도입했다(2번은 도카이도 담당 등). 이는 고다이고 천황 이전 통치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발상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일본 전국 지배 기구가 이후 일본 전국 정권 통치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셋째,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한정적인 역할밖에 갖지 않았던 슈고(守護)를 그 힘을 정확히 인식하고 슈고 ・ 고쿠시를 '병치'한다는 제도를 채용하여 권한을 늘리고, 무로마치 막부의 슈고 제도로 이어지는 단초를 만들었다.

모리 시게아키는 고다이고 천황을 뛰어난 혁명가이자 시대를 앞서 간 천재라고 평가했다. 즉, 가마쿠라 막부 → 겐무 신정 → 무로마치 막부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지만, 고다이고 천황이 정체되어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에 대한 '돌파구' 역할을 하고 차기 무로마치적 세계(室町的世界)가 성립하는 요소가 된 것을 평가했다. 또한 그의 정치 구상도 악한 것은 아니었고, 60년 정도 후에나마 그 많은 부분이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무렵에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 덕정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악한 정치는 천변지이로 이어진다는 천인상관설이 퍼져, 통치자들은 선정에 힘쓰고 천재를 막으려 했다. 덕정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소송 제도 개혁이었지만, 조의(고대의 궁정 의례)를 부흥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다. 고다이고 천황은 엔기・덴랴쿠의 치(10세기다이고무라카미 두 황제의 치세)를 부흥시켜야 할 덕정・조의의 이상으로 삼았다. 조의 부흥자로서 고다이고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사람들에게 “성대”로 추앙받았고(『고후시미 천황사서』), 남북조 시대에는 북조의 준삼궁니조 요스케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특히 조의 연구 면에서 유직고실에 정통하여, 스스로 『겐무 연중행사』라는 책을 저술하여 궁정의 권위 고양을 도모했다. 이 책은 행사의 기원 등의 일화는 생략되고, 언제 어떻게 실행하는가 하는 순서가 적힌 실천서가 되어 있으며, 사카이 노부히코는 건무 신정 하에서의 의례 집행에 대한 안내서로서 실천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40]。「미래의 선례가 되어야 한다」는 신정의 의기와 대조적으로, 이 책의 서문에서는「후세의 거울(모범)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더라도, 혹시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후세 사람들에게〕어떤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겐무연중행사』는 궁중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고후카쿠 천황(재위 1428년 - 1464년)은 이것을 필사하여 주석을 달고, 폐지되었던 행사를 이 책에 따라 부흥시키도록 아들인 고도고몬 천황(재위 1464년 - 1500년)에게 권했다. 나중에 자신도 『고스이미인 연중행사』를 저술한 고스이미 천황(재위 1611년 - 1629년)도, 이 책을 준토쿠 천황의 『금비초』와 나란히 보물로 여기고, 후세까지 남는 거울이라고 칭찬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하에서 대내리 조영을 계획했지만, 카이 겐요는 이것이 단순한 권력 과시가 아니라, '성대의 정무의 장'을 부흥시킴으로써 덕정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내리 조영 계획은 중과세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경・진수부대장군 키타바타케 아키에(키타바타케 친부의 장남)는 『키타바타케 아키에 상소문』(엔겐 3년/력응 원년(1338년))에서 중과세를 간했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대내리 조영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가메다 토시카즈는 조영 계획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겐코의 난에 의한 피폐가 회복되지 않은 시기에 했던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 신정 후기에는 윤지(천황의 사적인 명령문) 대신 태정관(율령제의 최고 기관)의 공식적인 공문서인 태정관부를 많이 발급했다. 카이는 태정관부 발급은 조의 부흥의 일환이며, 공가 덕정을 지향하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 구상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12. 2. 부정적 평가

가와치국(河内国)의 토호(土豪) 출신으로, 겐코의 난(元弘の乱)에서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많은 은상을 받았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평가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매송론(梅松論)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로 쫓겨 갔을 때, "천황께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카우지 공의 충성 덕분이다"라고 발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천하의 대세가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신뢰를 잃고 다카우지에게로 옮겨갔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48] 또한 태평기 서원원본(西源院本)에 따르면, 다카우지가 다시 동쪽으로 진군해 올 때, 고다이고 천황이나 공경들에게 "교토 안에서 다카우지를 맞아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싸우다 죽으라는 칙명을 내려 주십시오"라며 비통해했다는 마사시게의 말과 불만을 전하고 있다.[248] 마사시게는 효고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마자키(尼崎)에서 "아시카가 군세를 맞아 싸우기 위해 이 마사시게가 이즈미나 가와치의 슈고로서 칙명에 따라 군세를 일으키는데도 친한 족류와 일족들마저 난색을 표하거늘, 일반 고쿠진(国人) ・ 토민(土民)은 말할 것도 없다. 천하가 임금께 등을 돌렸다는 것은 명확하다. 마사시게의 목숨은 무익한 것으로 격전하다 죽을 것이다"라는 취지를 고다이고 천황에게 아뢰었다는 기록이 있다.[248] 다카우지와의 전쟁의 승패가 인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마사시게는, 세상 사람들이 천황이나 겐무 신정에 등을 돌리고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48]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는 간노(観応) 2년경에 자신이 이전 남조 측으로 돌아섰을 때 맺은 관계를 이용해 남조 측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남북조의 강화 교섭을 행했다. 이때 주고받았던 서간이 「요시노 어사 서안」(吉野御事書案)이다.[252] 여기서 다다요시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해 "고다이고 임금께서 아첨하는 신하들을 편애하셨던 것으로 인해 일이 대란에 이르렀습니다", "고묘 임금께서는 고다이고 임금으로부터 정식으로 삼종신기를 넘겨 받으셨고 무가 측은 양통질립의 원칙을 지켜 고묘 임금의 황태자로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을 세워 황위 계승에 대해 충분히 배려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임금께서는 독단으로 요시노에 잠행하셨으니 이를 가지고 무가 측이 천하를 찬탈하였다 비난함은 온당치 않습니다"라며 고다이고 천황의 행동을 비난한다.[253]

또한 화목 조건으로 공가 일통(公家一統)을 주장하는 지카후사에 대해 다다요시는 "겐무 신정의 실패를 생각하면 그것은 무리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습니다. 여러 구니(国)의 무사들이 그걸 바랄지 어떨지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하여, 당시 무사들, 그것도 쇼군 다카우지의 친동생으로 무가 세력의 제2인자이자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그 자신도 형 못지않은 많은 은상을 받았을 다다요시조차도 겐무 신정은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253]

北畠親房지엔과 함께 중세 역사가의 양대 산맥으로 여겨지는 뛰어난 학자이며,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後の三房" 중 한 사람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죽은 뒤에는 남조를 주도하고, 남조 准三宮으로서 황후 다음가는 지위에까지 올랐던 공경이다. 저서 『신황정통기』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죽음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늙은 몸에서 넘쳐나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어, 붓놀림조차 멈춰버렸다"라고, 친아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전사한 대목보다 더욱 강조하며 자신의 슬픔을 적었다.[254]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통합 평가로써는 고다이고 천황을 가장 뛰어난 천황의 한 명으로 평가하였다.[255] 그러나 정치 사상상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특히 『신황정통기』의 경우 겐무 정권의 인사정책에 대해서 고다이고 천황이 다소 아시카가 형제와 무가 전체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가 과했으며, 황족 ・ 귀족의 소유 영지까지도 무사의 은상으로 빠져나가버렸다고 비판적인 모습을 보인다.[256] 또한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의 지적과 같이 분지(文治) 5년(1189년)의 오슈 합전(奥州合戦) 은상으로써 관위를 주는 관례는 끊어져 있었는데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부활시켜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 ・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 무사시노카미(武蔵守) ・ 산기(参議)로 서위된 것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무사들에게 관위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257][258] 이 또한 지카후사는 "기껏 공가의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전보다 더한 무사의 세상이 된 것 같다, 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맹렬하게 항의하였다.[258]

그러나 현실주의자이자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지카후사는[259] 정치사상상으로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하면서도 그 후 정치 실무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남조의 지방 지휘관들은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을 인수받아 예하 무사에게 관위를 수여하는 독자적인 재량을 부여받았다.[260] 그중에서도 꽤 열심히 은상으로써의 벼슬을 나눠준 것이 실은 이 정책을 비판한 바로 지카후사 자신이었고, 도고쿠(東国) 무사들에게 관위 추천서를 남발했다.[261] 군사적 ・ 영토적으로 열세였던 남조에 있어서 고다이고 천황이 도입한 "은상으로써의 관위" 정책은 토지가 없어도 무사들로부터 구심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은상 시스템이라고 지카후사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261]

기타바타케 아키이에(霊山神社 소장)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아들로 남조 측 구교(公卿) ・ 진주후다이쇼군(鎮守府大将軍)이었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또한 고다이고 천황에게 상주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엔겐 3/랴쿠오 원년 5월 15일(1338년 6월 3일))에서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비판을 남기고 있다. 7개 조만이 남아 있는 그 내용은 분명하지 않으나[263] 적어도 남아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본다면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에 대한 실질적인 부정이 전부이다.[264]

현존하는 7개 조를 요약하면, "수도 한쪽에 대한 극도의 집중을 억제하고 지방 분권을 추진하여 각 방면에 반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장수를 둘 것", "조세를 낮추고 사치를 멈출 것", "은상으로써 관위를 주는 새로운 정책을 정지할 것", "구교 ・ 덴조비토(殿上人) ・ 승려에 대한 은혜는 천황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직무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할 것", "설사 교토를 탈환했다 하더라도 행차·주연은 삼가할 것", "법령 개혁의 빈도를 낮출 것", "아첨 하는 신하를 배제할 것" 등의 것이다. 현존하는 제1조는 고다이고 천황의 전국 지배의 통치기구에 대한 언급으로써 특히 중요하다.[265] 또 나머지 6조 중 절반이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에 집중돼 있는 것도 특징이다.[266][267]

고다이고 천황 편에 섰던 공가들은 마데노코지 노부후사(万里小路宣房)나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 등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을 제외하고는 대개 겐무 정권에 비판적이었다. 때문에 겐무(建武) 3년(1336년) 2월 29일에는 도인 긴카타(洞院公賢)를 위시한 공가층이 "엔겐"으로 연호를 고칠 것을 주장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고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나 공가들은 "고다이고가 세운 『겐무』 연호를 내리는 것도 신정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라며 적극적으로 연호를 고치는 데에 찬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정월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총신인 마데노코지 노부후사와 지구사 다다아키가 차례로 출가에 이르렀고, 이것도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때문에 고다이고 천황은 그 뒤 이제까지의 "신정"에 손을 대지 않고 오히려 "신정"에 비판적이었던 지카후사나 노부후사, 다다아키 등에게 대행시키는 것으로 공가층의 비판을 억누르려 하였다.

매송론』에서는 "기록소(記録所)와 결단소(決断所)를 두었다고 해도 측근 신하들이 몰래 소를 넣어 판결을 뒤집어 왜곡해 버리고, 천황의 결정을 보이는 윤지(綸旨)가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바뀌는 상황이라 여러 사람들의 부침이 손바닥 뒤집듯 하였다"라거나, "무사들은 겐무 정권이 보탬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무가가 공가에 원한을 품고 공가와 무가가 물과 불 같은 사이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립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관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군키모노가타리 『태평기』에서는 겐무 정권이 "정도(政道)가 바르지 못하였다"(政道正しからず)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생겨나 있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는 무가나 공가뿐 아니라 도시 주민들이 지방 주민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도시 주민들의 비판으로써 유명한 것이 교토 니조 강변에 내걸린 이른바 "니조 강변의 낙서"이다. 이 낙서의 내용은 "御代に生てさまさまの、事をみきくそ不思議共、京童の口すさみ、十分一そもらすなり"라는 말로 끝맺고 있으며 여기서 보이듯 이것이 당시 교토 서민들의 공통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방 주민들의 비판으로써 유명한 것은 겐무(建武) 원년(1334년) 여름에 와카사 국(若狭国)의 太良荘의 농민이 소를 올린 문서이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장원 영주의 당시에 대한 연공이 무거워졌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연공이 무거워진 것은 고다이고 천황이 대내리(大内裏)를 짓는 등의 공사를 위해 여러 구니에 수입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매겼던 것과 관계가 있으며 지방 주민들에게 있어서도 겐무 정권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태평기』(1370년경 완성) 권1 "後醍醐天皇御治世의 事무가번창의 事"(유포본)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처음에는 명군으로써 등장하고, "하늘이 내리신 성군이요 땅이 보우하는 명군이라"(天に受けたる聖主、地に報ぜる明君)고까지 상찬되었다.[275] 그런데 권12에서 13에 걸쳐 겐코의 난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타도되고 겐무 신정이 열리게 되자 이번에는 일변하여 완전한 암군으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은상 배분에 있어서 지나치게 공가 편향적인 모습을 보인다거나, 무리하게 대내리 조영을 계획한다거나, 지토 ・ 고케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거나, 갑자기 화폐를 주조해 발행하고 그것을 밀어붙인다거나, 무사들의 특권 계층이었던 고케닌 신분을 무시하는 등 현실과 맞지 않는 정책을 남발하고 나아가 자신의 측근인 공경 지구사 다다아키나 승려 몬칸이 권세를 휘두르며 교만이 극에 달하고 사치를 남발하는 등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의 사학자 가메다 도시카즈에 따르면 이러한 "『태평기』 사관"이 후세 일본에서 일종의 주술적인 속박으로 이어졌고, 고다이고 천황과 겐무 정권에 대한 평가를 고정적인 것으로 굳혀버리고 말았다고 하였다.

그 밖에도 남북조 시대의 여러 작품 속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암군상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서는 『매송론』이나 풍자글 『니조 강변의 낙서』라 불리는 문서들이 열거된다.

에도 시대가 되어 이러한 『태평기』 사관을 이어받은 일본의 주자학자나 역사가들에게도 고다이고 천황은 엄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독사여론』(쇼토쿠(正徳) 2년(1712년)), 미야케 간란(三宅観瀾)의 『중흥감언』(中興鑑言, 에도 시대 중기), 그리고 라이 산요(頼山陽)의 『일본외사』(분세이 10년(1827년)) 등 당시 일본의 주요 정치 서적이나 역사 서적이 거지반 『태평기』가 제시하는 『태평기』 사관 그대로 비판적으로 고다이고 천황을 평가하였다.

미야케 간란이나 라이 산요는 당시 에도 막부가 퍼뜨렸던 유교적인 대의명분론 즉 신하는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주군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상의 유력한 논객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띄우면서 일본 사회에 남조 정통 사관을 널리 퍼뜨리는데 일조한 공로자였으나, 그런 그들에 의해 도리어 고다이고 천황에게는 "부덕한 군주"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왜 남조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사관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비판되는 사태가 벌어졌는가에 대해서 일본의 사학자 가메다 도시카즈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남조 정통 사관이라는 것은 "남조가 정통"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적 수완을 찬미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데, 사실 "남조의 정통성"이나 "대의명분론", "충신론"과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다이고 천황이 "어리석고 부덕한 군주"이기에, 그럼에도 정통성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암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한 몸 내던져 섬기고 받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충신"의 "비극성"이 일본에서는 이른바 한간비이키(判官贔屓)의 형태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정식으로 남조가 일본의 정통으로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공인되었고, 민간에서는 대의명분론이 주류였으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실증을 중시하는 기풍이 생겨났고, 일본 역사의 대부분의 분야에서는 연구에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겐무 정권 ・ 남북조 시대에 대한 정치 연구에 대해서는 전근대의 『태평기』 사관이 거의 변화하지 않았고, 도쿄 제국대학이나 교토 제국대학의 일본사 연구자들로부터 일관되게 고다이고 천황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고다이고 천황이 신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고 지적했고, 나카무라 나오카쓰(中村直勝)는 고다이고 천황의 화폐 주조 정책에 어느 정도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구메나 나카무라 모두 기본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에 대해 혹평하였다.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도 구로사카 가쓰미(黒板勝美)도 고다이고 천황의 은상 정책을 중심으로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으며, 그 내용은 거의 『태평기』와 같은 것이었다.

전후 바로인 1940년대 후반에는 마쓰모토 신파치로(松本新八郎) 등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비판이 시도되었고, 겐무 정권은 반혁명 노선 ・ 복고주의를 따른 실패라고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1960년대 일본의 사학자 사토 신이치를 중심으로 고다이고 천황은 중국의 황제를 모방한 독재자이자 전제군주였다는 인물상이 제창되었고, 겐무 정권에 대해서도 그 정책은 시대의 흐름이나 현실 문제를 무시한 것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사토 신이치의 학설은 정설로써 20세기 후반 일본의 남북조 시대 연구의 대세를 이루었고 이러한 인물상이나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2010년대에 들어서도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山川出版社 『상설 일본사 일본사B』(詳説日本史 日本史B) 2012년판 등)에 채용되는 등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적인 수준에서는 정설로써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일었던 새로운 연구의 흐름에서는 여러 연구자들로부터 강한 이의가 제기된다.

고다이고 천황 독재군주설에서의 겐무 신정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겐무 신정은 표면상으로는 복고적이었으나 내실은 중국적인 천황 전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성급한 개혁과 은상의 불공평, 조변석개를 거듭하는 법령과 정책, 귀족이나 거대 지샤(寺社)로부터 무사에 이르는 광범위한 세력의 기득권 침해, 때문에 빈발하는 소송에 대한 대응 불비, 오로지 증세를 재원으로 하는 대내리 건설 계획, 지폐 발행 계획 같은 비현실적인 경제 정책 등 그 시책의 대부분이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무사 세력의 불만이 커졌을 뿐 아니라 공가조차 대부분이 정권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으며, 또한 유명한 니조 강변의 낙서에서 보이듯 그 무능함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져 권위는 실로 실추하였다.

가메다 토시카즈는 전체적으로 볼 때 초기 무로마치 막부는 전대 가마쿠라 막부의 체제를 모방했을 뿐 독자적인 정치 구조를 창출하지 못했다고 결론짓고 있다.[89] 나카이 유코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이 이미 전대부터 보이는 것이 명확하며, 고다이고 천황이 특이한 존재라는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16]

혼고 카즈토는 고다이고 천황이 "원정을 부정"하고 천황 친정을 실현함으로써 "현명한 천황"이라고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 상황이 될 수 없었던 것이며, 상황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의 천황 친정은 고우다 상황 등 역대 상황들에 의해 구축된 "덕정"을 계승하지 않았고, "덕정"이 단절된 것도 지적하고 있다.[13] 더 나아가 혼고 카즈토는 메이지 이래의 역사학이 다이카 개신, 겐무 신정(겐무의 중흥), 메이지 유신을 3대 화기로 평가함으로써 고다이고 천황이 "현명한 천황"으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덕정"을 더 잘 실행해 온 고우다 상황이나 하나조노 천황이 천황가의 역사에서도 극히 뛰어나다고 논하고 있다.[13] 또한 혼고 카즈토는 고다이고 천황이 "현명한 천황"이었기 때문에 막부 타도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가마쿠라 막부의 내부가 엉망이었고, 기회만 있으면 무너질 상황이었기에 고다이고 천황과 같은 인물이라도 막부 타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13]

가메다 토시카즈는 고다이고 천황의 정권 발족 직후부터 모순되는 논지나 위조된 논지가 대량으로 발급됨으로써 신정권이 대혼란에 빠진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저서에 적고 있다.[89] 또한 가메다 토시카즈는 『니조 강변의 낙서』에서 "요즘 도쿄에서 유행하는 것, 야습, 강도, 모륜지, (중략) 본령이 되는 소송인"이라고 고다이고 천황이 풍자된 것도 사실이라고 저서에 적고 있다.[89]

고자 유이치는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계획의 허술함은 이전부터 지적되어 왔고,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적 자질 부족을 논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저서에 적고 있다.[17]

혼고 케이코는 하나조노 천황이 겸손하게 성학을 배우고 선정을 추구한 것에 반해, 고다이고 천황이 성학에서 배운 덕은 "비대해진 자아" 그 자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겐무 정권에서 설치된 "구소"라는 조직이 가마쿠라 막부의 "몬주쇼(問注所)"의 "문주"의 초서가 "구"와 비슷하기 때문에 말장난으로 정해졌다는 설을 소개하며, 교만과 둔감함이 보인다고 비판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전통적인 공가 정권의 패러디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90] 겐무 정권의 가격·선례에 얽매이지 않는 인사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했다고 논하고 있다. 또한 고다이고 천황은 두 명의 천황·두 개의 조정을 만들어냄으로써 천황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하락시켰다고 논하고 있다.

12. 3. 현대 역사학계의 논쟁

태평기(太平記)』(1370년경 완성) 제1권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이 처음에는 명군으로 묘사되어 "하늘이 내린 성주, 땅이 보우하는 명군"으로 칭송받는다.[275] 그러나 겐코의 난(元弘の乱)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겐무 신정이 시작되는 제12권부터는 암군으로 묘사된다.[275] 은상 배분의 편향성, 다이내이리(大内裏) 조영 계획, 지토(地頭)・고케닌(御家人)에 대한 과중한 세금 부과, 화폐 발행 강행, 고케닌 신분 무시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남발하고, 측근 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顕)와 승려 몬칸(文観)의 횡포로 백성의 불만을 샀다. 현신 마데노코지 후지후사(万里小路藤房)가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학자 가메다 도시카즈(亀田俊和)는 이러한 『태평기』 사관이 후세 일본에서 고다이고 천황과 겐무 정권에 대한 평가를 고정시켰다고 주장한다. 남북조 시대의 『매송론(梅松論)』, 『니조 강변의 낙서(二条河原の落書)』 등도 고다이고 천황의 암군상에 영향을 주었다.

에도 시대의 주자학자와 역사가들 역시 『태평기』 사관을 계승하여 고다이고 천황을 비판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독사여론(読史余論)』(1712), 미야케 간란(三宅観瀾)의 『중흥감언(中興鑑言)』, 라이 산요(頼山陽)의 『일본외사(日本外史)』(1827) 등 주요 정치서적과 역사서가 『태평기』와 유사한 비판적 평가를 내렸다.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편찬한 《대일본사》에서는 남조 정통론의 입장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부덕하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대의명분론(大義名分論)에 입각하여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칭송하고 남조 정통 사관을 퍼뜨렸지만, 동시에 고다이고 천황에게는 '부덕한 군주'라는 낙인을 찍었다.

가메다 도시카즈는 남조 정통 사관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비판받는 이유를, '남조 정통성', '대의명분론', '충신론'과 '고다이고 천황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별개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고다이고 천황이 '어리석고 부덕한 군주'였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비극성'이 한간비이키(判官贔屓)의 형태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 남조가 정통으로 공인되면서 대의명분론이 주류가 되었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실증주의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겐무 정권과 남북조 시대의 정치 연구는 『태평기』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도쿄 제국대학과 교토 제국대학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고다이고 천황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신하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카무라 나오카쓰(中村直勝)는 화폐 주조 정책에 대한 부분적 호평을 제외하고는 혹평했다.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와 구로사카 가쓰미(黒板勝美)도 은상 정책을 중심으로 비판을 전개했다.

1930년대 황국사관의 대표적 연구자인 히라이즈미 기요시(平泉澄)는 예외적으로 고다이고 천황을 재평가했다. 그는 『겐무 중흥의 본의(建武中興の本義)』(1934)에서 겐무 정권의 장점을 논증하고, 은상 불공평설을 반박했다. 그러나 겐무 정권의 실패 책임을 '부패한' 백성과 '역적'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전가하는 한계를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히라이즈미 기요시는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그의 연구는 영향력을 잃었다.

패전 후 마쓰모토 신파치로(松本新八郎) 등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겐무 정권을 반혁명적 복고주의로 비판했다. 1960년대 사토 신이치(佐藤進一)는 고다이고 천황을 중국 황제를 모방한 독재자로 규정하고, 겐무 정권의 정책이 현실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이 학설은 정설로 20세기 후반 남북조 시대 연구의 대세를 이루었고, 2010년대까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채택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새로운 연구 흐름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사토 신이치의 고다이고 천황 독재군주설에 따른 겐무 신정 해석은 다음과 같다. 겐무 신정은 복고적이었으나, 내실은 중국식 천황 전제를 목표로 했다. 성급한 개혁, 불공평한 은상, 조변석개하는 법령과 정책, 광범위한 세력의 기득권 침해, 소송 대응 미비, 증세를 재원으로 한 다이내이리 건설 계획, 지폐 발행 계획 등 비현실적인 경제 정책이 비판받았다. 무사 세력뿐 아니라 공가도 정권에 냉담했고, 니조 강변의 낙서에서처럼 무능함이 비판받으며 권위가 실추되었다.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는 '이형의 왕권'론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평가하며 '이형'의 천황이라 불렀다.[87]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사교' 승려 몬칸과 '악당'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거느리고, '이류이형의 무리'나 비인 등 사회에서 벗어난 계층을 포용하여 힘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1329년 고다이고 천황의 기도가 '성천공'(대성환희천 욕유공)이었음을 지적하며, "고다이고는 인간 심연의 자연, 섹스 그 자체의 힘을 왕권의 힘으로 삼으려 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당시 천황의 지위가 '천대의 직'(세습이 아닌 옮겨 다니는 직책)인 '천황직'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하나조노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은 각각 도의와 이형이류의 힘, 화폐의 힘('마력')을 통해 위기에 대항하려 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은 현실의 '가혹한 복수'에 직면하여 몰락했다고 주장했다.

모리 시게아키(森茂暁)는 아미노 설의 종교적 사료 발굴과 고다이고 천황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평가하면서도, 몬칸을 이단으로만 보는 것은 정치적 대립자들의 비방을 수용한 것이며, 『겐무키(建武記)』에는 '이형의 무리'의 침입을 금하는 글이 있어 고다이고 천황이 '이형의 무리'와 거리를 두었다고 지적했다. 가메다 도시카즈는 아미노 설이 겐무 정권을 실정으로 보고 그 실패를 고다이고 천황 개인의 성격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태평기』 사관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패전 후 겐무 정권의 실증적 연구는 진전되었지만, 역사관 자체는 『태평기』, 사토 신이치, 아미노 요시히코 설을 답습했다. 모리 시게아키는 『고다이고 천황』(2000)에서 겐무 정권에 세 가지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

첫째, 겐무 정권 발족으로 일본의 중심이 교토로 명시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주장을 물리치고 교토를 무로마치 막부의 거점으로 삼았다. 둘째, 전국 지배를 위한 법무 기관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에 1번 1구제를 도입했다. 이는 고다이고 천황 이전 통치자들에게는 없던 발상으로, 이후 전국 정권 통치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일본 국토에 명실상부한 전국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겐무 신정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서술했다. 셋째, 가마쿠라 막부에서 제한적이었던 슈고(守護)의 힘을 인식하고 슈고・국사 병치 제도를 채택하여 권한을 늘리고, 무로마치 막부의 슈고 제도로 이어지는 단초를 만들었다.

모리 시게아키는 고다이고 천황을 뛰어난 혁명가이자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평가했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정치의 '돌파구' 역할을 하고 무로마치적 세계 성립의 요소가 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그의 정치 구상도 악한 것이 아니었고, 60년 후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에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1988년 이치자와 데쓰(市沢哲)의 「가마쿠라 후기 공가 사회의 구조와 '치천의 군(治天の君)'」, 1992년 「가마쿠라 후기 공가 정권의 구조와 전개」, 1998년 이토 기요시(伊藤喜良)의 「겐무 정권 시론」은 고다이고 천황 연구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치자와는 겐무 정권의 정책이 가마쿠라 시대 후기 조정의 소송 제도 개혁과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토는 겐무 정권의 기관이 겐무 정권의 중핵이며, 개혁이 발전 과정이라고 재해석했다.

1988년 이치자와는 고다이고 천황의 중앙집권정책이 개인적 성격이나 시대 흐름에서 벗어난 특수한 것이라는 사토, 아미노 설을 부정했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 교토 조정의 소송 제도 개혁으로 치천의 군(인과 천황 포함)의 권력에 의지하는 사례가 늘었고, 시대 흐름이 중앙집권적 군주 탄생을 촉진했다고 보았다. 고다이고 천황의 발탁 인사도 지묘인 왕통도 행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치자와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 조정 소송 사례를 검증하여, 13세기 말 귀족 가계 증가로 가독・소유 영지 상속 관련 소송이 늘었고, 관위・관직 쟁탈전도 주요 문제였다고 보았다. 귀족 사회의 분가화 진행과 억제라는 압력이 충돌하여 소송 문제로 현재화되었다.

이러한 소송 재결자로 힘을 가진 것이 치천의 군이다. '치천의 군' 지위 자체에 큰 권위는 없었지만, 치천의 군 자신이 토지 권리 소유자였기에 토지 권리에 기반한 권력으로 토지 분쟁 소송을 해결했다. 이치자와는 토지 문제 외 분쟁에도 치천의 군이 재결 권리를 주장했음을 지적하고,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지 재판도 토지 지배 제도(직의 체계) 밖에서 비호・조정하는 존재였다. 고후쿠지(興福寺) 등 '권문'의 권위가 약해졌을 때 치천의 군 이름으로 권문 판결에 개입하여 돕는 경우도 있었다. 난보쿠초 시대 권문에서 조정으로의 기소 경로도 가마쿠라 후기 권문들이 담당 부교(奉行)를 할당했던 것의 발전형이라고 보았다. 조정 소송 문제 증가로 치천의 군 역할도 커졌다.

13세기 말~14세기 초, 고다이고 천황 시대에 일본에서 천황, 상황은 단순 토지 소유자가 아니라 '치천의 군' 지위 자체에 소송 문제 해결에 강대한 권위와 권력이 있었다.

일본 왕통이 가메야마~고다이고 등 다이카쿠지 왕통과 지묘인 왕통으로 분열된 양통질립은 고사가 천황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붕어했기 때문이며, 강제력이 없어 자연 해소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어진 이유는 당시 일본 공가 사회 분열이 왕통 분열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이카쿠지 왕통 유리 상황에서 지묘인 왕통이 반격한 배경에는 유력 공가 사이온지 가 내부 분열이 관련되었다. 니조 파(二条派)와 교고쿠 파(京極派)로 나뉜 미코사 가 등 중소 규모 공가들도 왕통에 따라 분열하여 왕통 분열을 뒷받침했다. 뇨인 소유 영지를 두 왕통이 분할 상속받아 장원 영주로 최대 존재가 된 것도 분열을 가속화했다.

두 왕통 간 무력 행사 상황에서, 막부(가마쿠라 막부)가 싸움을 억제하여 싸움은 벌어지지 않고 대립만 깊어졌다.

'치천의 군' 지위 자체에 소송 해결 권능이 있어 두 왕통 힘이 비슷해지자 왕통 교체 때마다 재판 당사자 중 누가 유리한가 하는 상황이 바뀌었다. 재결이 뒤집히는 사례도 나왔고, 고다이고 천황과 하나조노 천황 간 싸움 사례도 있다.

두 왕통은 항쟁 승리를 위해 인재 획득 경쟁을 벌였다. 조정 집안 격을 뛰어넘은 발탁 인사는 겐무 정권의 인상에서 고다이고 천황 등 다이카쿠지 왕통 특징으로 보이지만, 지묘인 왕통도 거의 똑같이 행했다. 고후시미 천황은 히노 도시미쓰(日野俊光)를, 고곤 천황은 히노 스케나(日野資名)를 발탁했다. 『마스카가미(増鏡)』 작자는 '구메노사라야마'(久米のさら山)에서 발탁 등용된 인재에 대해 두 왕통 모두 기록했다.

소송 문제에 관한 치천의 군 권력은 커졌지만, 왕통 교대로 멀어지는 일도 벌어져 모순과 왜곡이 심해졌다. 이를 해결하려면 상대 왕통을 쓰러뜨리거나, 양통질립 유지를 지지하는 막부를 쓰러뜨려야 했다. 고다이고 천황뿐 아니라 누군가 막부를 쓰러뜨려야 해결될 문제였다. 아쿠토(悪党)라 불리는 막부 대항 무사(구스노키 마사시게 등)들이 발생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 타도가 필요했고, 그것이 가능한 시대에 살았으며, 마침 치천의 군이었을 뿐, 고다이고 천황 개인이 시대 흐름을 벗어난 존재는 아니었다. 시대 흐름이 고다이고 천황을 막부 타도의 장으로 나서게 했다.

1992년 이치자와는 사토 신이치 설의 문제점으로, 사토가 헤이안 시대 후기 조정 정치와 겐무 정권 조정 정치를 비교하면서 가마쿠라 시대 조정 정치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겐무 정권 직전 시기인 가마쿠라 시대 후기 조정 정치 연구 없이 겐무 정권이 특이한 정권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는 도시 영주(교토 등 기나이에 살며 일본 각지 장원(荘園)에 이권을 가진 대귀족, 대신사, 대찰)가 사병을 부려 싸움을 벌이는 전쟁 시대였다. 귀족 사회 분가화, 무가의 슈고・지토에 의한 영지 지배로 도시 영주 간 항쟁이 활발했다. 항쟁은 기존 지배 체제 강화, 다른 영주로부터의 약탈로 인해 벌어졌다.

쇼오(正応) 3년(1290)~이듬해 기이 국(紀伊国) 아라카와 장(荒川荘)에서 고야 합전(高野合戦)이 벌어졌다. 진언종 본산 고야 산이 다른 장원 영주 군세를 보내 장원 지배 체제를 강화하려 하자 토착 호족 미나모토노 다메토키(源為時)가 선수를 쳐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메토키는 히에이 산 엔랴쿠지(延暦寺)에 호소하여 진언종과 천태종 간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고우다 천황이 요쓰지노미야(四辻宮)에서 장원 접수를 시도하며 '아쿠토' 군사력을 보내 싸우게 된 사례도 있다.

군사력 항쟁은 최후 수단이고, 대화로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었기에, 무력 항쟁이 활발해지면서도 소송 제도 중요성이 공가 사회에서 재인식되어 항쟁 회피, 사태 해결을 위해 제도 정비, 개혁이 진행되었다.

이치자와는 재판 당사자들이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치천의 군에 의한 칙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음을 지적했다. 소송에서 '덕정(徳政)'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당시 덕정은 천인상관설에 따라 위정자가 악정을 행하면 천변지이가 일어나고, 선정을 행하면 재해가 다스려진다는 사고방식이다. 소송 문제 해결이 치천의 군에게 '덕정'이었고, 조정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토지 지배 구조 변화에 따라 '치천의 군'이라는 초월적 입장을 이용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 당시 일본 천황가에 요구되는 역할이었다.

겐무 정권에서 고다이고 천황이 먼저 행한 행동은 개별안도법(個別安堵法, 겐코 3년 6월 15일 구선안)이었다. 이 통달과 이후 법령은 윤지(綸旨, 천황의 사적 명령문)로 영주들에게 토지 권리를 보증하고 소송・신청 재결도 윤지를 필요로 한다고 정했다. 사토 신이치는 이를 고다이고 천황의 절대적 권력 집착욕으로 간주하여 겐무 정권의 이상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후기 치천의 군 권력으로 토지 문제에 재결을 내린다는 발상은 이미 고다이고 천황 이전부터 존재했고, 도시 영주들에 의해 요구되었다. 고다이고 천황 정책은 당시 영주들의 요망에 응하여 시대 흐름에 답했던 것이다.

'치천의 군' 권력 강화가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는 왕통 분열로 발생하는 모순을 더욱 키웠다. 왕통 분열은 누군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소송 문제에 대한 요청이 고다이고 천황의 행동을 촉발했다.

사토가 '헤이안 시대 이래 질서 파괴'라고 주장하는 겐무 정권의 다른 정책에 대해서도 이치자와는 헤이안 시대가 아니라 가마쿠라 시대 후기 정치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사토는 지교고쿠슈(知行国主, 고쿠시보다 상위에서 특정 구니를 사실상 지배하는 대귀족 또는 거대 지샤)가 특정 집안에 연결되어 있던 것을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정권에서 새로운 슈고・고쿠시 제도를 만들면서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후기 양통질립 이래 천황 왕통이 바뀔 때마다 지교고쿠슈가 바뀌는 경우가 많아 특정 국가=특정 집안이라는 인식은 무너져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슈고・고쿠시 제도는 급진적 개혁이 아니었다.

사토는 고다이고 천황이 '관사청부제(官司請負制) 파괴' 정책을 행했다고 주장했다. 음양료(陰陽寮) 관직을 아베 가문(安倍氏)이나 가모 가문(賀茂氏)이, 법률관 관직을 사카노우에 가문(坂上氏)이나 고레무네 가문(惟宗氏)이, 문서 작성 관직을 기요하라 가문(清原氏)이 맡는 식으로 특정 관직이 특정 집안에 결부되는 것을 송 왕조형 관료제 영향으로 파괴하고 관사를 고다이고 천황 지배하에 둔다는 관념적 독재 정치를 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치자와는 조사 결과 관사청부제 파괴는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직무에 능력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뿐이었다고 밝혔다. 간무(官務)・교쿠무(局務) 등 서기관, 사무관 등 능력이 요구되는 직책은 오쓰키 가문(小槻氏) 등 종래 관료적 씨족이 담당했다. 마료(馬寮) 등 직무가 없으면서 이익을 받는 은상적 관직의 경우 고다이고 천황은 공로자에게 은상 대신 자유롭게 배분했다. 이는 고다이고 천황 특유의 것이 아니고, 13세기 중반부터 은상적 관직은 특정 집안으로 돌리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는 경향이었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부터의 은상적 관직 분배를 좌우할 수 있었던 힘이 가마쿠라 시대 후기 치천의 군 권력 강화와 얽혀 있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치자와는 고다이고 천황・겐무 정권의 중앙 집권 정책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가마쿠라 시대 후기 조정의 소송 제도 개혁 중 영주들의 요구에 응해 생겨난 '치천의 군' 권력 강화 흐름과 정책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무사의 소료(惣領) 선정에 원칙적으로 간섭할 수 없었는데, 무로마치 막부는 상속법이 없고 소료 선정에 강한 권력을 가졌다. 이치자와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 치천의 군 권력(조정 권력) → 겐무 정권 중앙 집권 정책 → 무로마치 막부 중앙 집권 정책으로 이어진다고 보아, 겐무 정권과 무로마치 막부 사이에도 정책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12. 4. 한국의 관점에서의 재조명

13. 관련 인물

고다이고 천황은 수많은 황족, 궁녀, 귀족들과 관계를 맺었다. 주요 인물로는 황후 (중궁)였던 사이온지 기시(후 고쿄고쿠인 황태후)와 준시 내친왕(후 신무로마치인 황태후)이 있다. 사이온지 기시는 사이온지 사네카네의 딸로, 고다이고 천황과의 사이에서 간시 내친왕 등을 낳았다. 준시 내친왕은 고후시미 천황의 딸이다.

사이온지 기시(Saionji Kishi)와 고다이고 천황. 『태평기화첩』(17세기경), 제2권, 황후의 애도에서. 사이타마현 역사민속박물관 소장


고다이고 천황은 여러 궁녀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에는 쓰네나가 친왕, 나리나가 친왕, 노리요시 친왕, 모리나가 친왕, 무네나가 친왕 등이 있다. 특히, 아노 렌시(후 신타이켄몬인 황태후)는 고무라카미 천황의 어머니로 중요한 인물이다. 미나모토노 치카코는 모리나가 친왕의 어머니이다.

고다이고 천황 시대의 대정권(Daijō-kan)에는 관백(Kampaku)으로 니조 미치히라, 이치조 우치츠네, 쿠죠 후사자네, 타카츠카사 후유히라, 코노에 쓰네타다, 타카츠카사 후유노리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좌대신(Sadaijin), 우대신(Udaijin), 내대신(Naidaijin), 대납언(Dainagon) 등의 직책이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근위 경충, 만리소로 선방, 호타케 친방, 요시다 사다방, 히노 스케토모, 히노 토시모토, 치구사 다다아키라, 보몬 기요타다, 시죠 타카스케, 도인 사네요, 문관, 엔칸 등과 같은 인물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휘(諱)인 '尊治'의 '尊'자를 여러 황자와 무사들에게 하사했다. 황자 중에서는 '''尊'''良 친왕, '''尊'''운 법친왕(후의 모리나가 친왕), '''尊'''澄 법친왕(후의 무네나가 친왕) 등이 '尊'자를 받았다. 무사 중에서는 足利'''尊'''氏가 대표적이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尊'자를 받아 이름을 足利高氏에서 足利'''尊'''氏로 바꾸었다. 이 외에도 饗庭'''尊'''선 (饗庭氏直), 吉良'''尊'''의 등이 '尊'자를 받았다. 小田'''치'''久는 小田高知에서 개명했다.

14. 관련 유적 및 문화재



릉은 궁내청에 의해 나라현요시노군요시노정 오오지 요시노야마 아자 토노오의 여의륜사 내에 있는 탑오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 상의 형식은 원구이다.

통상 천황릉은 남쪽을 향하지만, 고다이고 천황릉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북쪽의 교토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고다이고 천황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군기 이야기 『태평기』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이 “'''옥골은 비록 남산의 이끼에 묻히더라도, 혼백은 항상 북궐의 하늘을 바라보리라'''”고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유언에 따라 “'''붕어하신 모습을 바꾸다'''”라고 하여, 화장은 하지 않고 토장으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쿠스미 도시카즈는 토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지만, 천황이 붕어하였을 경우 토장에 의한 산릉 조영이 관례였기 때문에, 고다이고 천황의 붕어 후에도 원호를 붙이지 않고 “천황으로서의 붕어(천황붕)”에 고집한 남조가 토장 후에 산릉을 조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있다.

나라현(야마토국)에 매장된 마지막 천황이다.

메이지 22년(1889년)에 같은 정에 세워진 요시노 신궁에 봉안되어 있다.

황거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과 함께 천황의 영이 봉안되어 있다.

고다이고 천황이 자의를 허락하여 관사로 삼았던 총지사(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쓰루미구)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존상, 존의 등을 봉안하는 영전이 있다. 이 영전은 고다이고 천황의 600년 원기를 기념하여 쇼와 12년(1937년)에 건립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의 보제를 기리기 위해 천룡사를 조영했다. 또한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오츠키 마사히사나 요시다 카네토모와 같은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동산산장(현 자조사)의 동구당에 고다이고의 위패를 안치하고 예배했다.[1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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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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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서적 井上 198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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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서적 安西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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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서적 森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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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일반
[172] 서적 博文館編輯局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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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서적
[177] 설명
[178] 서적
[179] 서적
[18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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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웹사이트 『大日本史料』6編1冊170–181頁 https://clioimg.hi.u[...]
[188] 서적
[189] 서적
[190] 서적
[191] 서적
[192] 간행물 「神奈川県:鎌倉市 > 小町村 > 宝戒寺」 『日本歴史地名大系』 平凡社
[193] 간행물 足利尊氏寄進状建武2年(1335年)3月28日付 『神奈川県史』資料編3
[194] 간행물 「将軍足利尊氏寄進状案」「将軍足利尊氏御教書案」「惟賢灌頂授与記」 『神奈川県史』資料編3, 『鎌倉市史』史料編1
[195] 서적 【北条氏と南朝】5 鎌倉幕府滅亡後も、戦いつづけた北条一族 洋泉社
[196] 서적
[197] 서적 終章 果たして尊氏は「逆賊」か>足利尊氏の死去
[198] 서적
[199] 서적 終章 果たして尊氏は「逆賊」か>果たして尊氏は「逆賊」
[200] 서적
[201] 서적
[202] 서적
[203] 백과사전 建武年中行事 小学館
[204] 서적
[205] 서적 緒言
[206] 서적
[207] 서적
[208] 서적
[209] 서적
[210] 서적
[211] 서적
[212] 서적
[213] 서적
[214] 서적
[215] 서적
[216] 서적
[217] 서적 中世禅者の軌跡:中厳円月 法蔵館
[218] 간행물 無文元選 吉川弘文館
[219] 서적 夢中問答集 講談社
[220] 서적
[221] 서적
[222] 기타
[223] 기타
[22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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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기타 #국가지정문화재 데이터베이스 항목 後醍醐天皇宸翰天長印信(〓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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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서적 神皇正統記
[256] 서적 2016
[257] 서적 2016
[258] 서적 2016
[259] 서적 2014
[260] 서적 2016
[261] 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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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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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서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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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서적 太平記の世界 変革の時代を読む 日本放送出版協会 1987
[280] 교육자료 고등학교 일본사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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